1. 비단장수 구서방
구 서방에게는 '진주라 천리길'이 아니라 진주가 고향에서 지척에 있는 땅이었다. 1907년 진양 지수면 승내리에서 태어난 구인회는 열 네 살에 두 살 위인 바로 옆집 처녀 허을수와 결혼한다. 결혼 전 한학을 배워 사서삼경을 떼고 결혼 후 지수보통학교 2년에 편입학한다.
서당은 전통적인 우리나라 교육 기관이고 보통학교는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면서 생긴 신식 학교이다. 지수보통학교가 생기자 학령(學齡)을 넘긴 열 댓살 혹은 스무 살이 넘은 애아버지들이 몰려들었다. 이 때에 구인회는 삼성 그룹의 창업자가 될 이병철과 한 때 같이 학교에 다녔다.
진양에서 서울로
일본인들의 조선인 천대(賤待) 사건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지수보통학교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일본인 교장 아들이 조선인 학생한테 얻어 맞자, 교장은 아들을 구타한 학생을 교무실로 불러 하루 종일 벌을 세워, 나중에는 오금이 저려 일어서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 학생들이 교장을 상대로 항의 동맹 휴학에 들어갔고, 구인회도 주모자 열 명 중의 하나였다.
지수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외가가 있는 서울로 올라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진양 촌놈이 서울에 올라와 고보를 다니는 동안 구인회의 가슴에는 산골과 한양의 문화의 차이가 얼마나 큰 지를 깊이 체득한다. 구인회는 시골에서는 볼 수 없던 축구(蹴球)라는 것도 해보며, 청소년의 티없는 꿈을 키운다. 1925년에 아들 자경을 낳고, 중도에 중앙고보를 그만 둔 구인회가 낙향(落鄕)했다.
고향에 협동조합이라는 것이 있었다. 마산과 진주 같은 곳에 나가 생활 필수품을 사다가 파는 일종의 시골 상점이었다. 구인회는 조합에서 일하며 물건을 사다 파느라고 마산과 진주를 오간다. 주로 사다 판 물품은 석유 비단 광목 등이었다. 이 때에 구인회는 자유당 정부가 망한 후에 과도정부를 이끈 허정 등과 소인극단 활동을 했고,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하여 지국장도 했다.
서울-하향-진주
집은 부유한 편이었으나 다섯 아우에 3남1녀의 아버지가 되었다. 나이는 벌써 스물 네 살이 되었다. 시골에 그냥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났다. 아우 철회와 함께 진주에 나가 장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진주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포목 장사가 잘 되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 포목 장사를 하자, 그래서 형제가 힘을 합하여 구인상점의 문을 열었다. 이리하여 시골 청년 구인회는 동생 철회와 함께 진주에서 비단장수가 되었다. 1931년의 일이다. 동생 돈과 자신의 돈을 합해도 장사 밑천이 모자라 은행에서 융자를 받았다. 장사를 하자면 은행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를 이 때에 알았다. 장사가 잘 되었다. 5남을 낳은 다음에 가족을 진주로 솔가(率家)했다.
병자년의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하늘에 먹구름이 뒤덮혀 천지는 이상한 조짐에 휩싸였다. 아니나 다를가, 한 두 방울 왕방울처럼 내리던 비가 폭우(暴雨)로 변하여 진주 명강 남강이 넘쳐 흐르고 진주 시내에 물난리가 났다. 쏟아져 내리는 하늘의 비는 더욱 억수같아 홍수가 났다. 시내로 흘러 들어오는 흙탕물은 한 채 두 채 저지대의 집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구인상점도 물난리가 났다. 보통 물난리가 아니었다. 비단과 광목은 홍수가 난 흙탕물에 젖으면 끝이다. 구인회는 지붕으로 올라가고, 구철회는 밑에서 물건을 올려 주고 있었다. 벌써 앞 집은 물에 잠기고 있었고, 눈 깜짝할 사이에 구인상점도 목까지 물이 차올랐다. 할 수 없이 물 속에 있던 철회도 지붕으로 올라와 형제는 지붕 위에서 비를 맞으며 오돌오들 떨고 있었다. 조금만 비가 더 오면 두 형제는 물에 휩쓸려 떠내려갈 위기가 되었다.
벌건 물결이 넘실거리고, 살림살이는 물론이고 소 돼지가 떠내려 가고 있었다. 그런 위험한 상황에 지붕 꼭대기에 있던 구인회는 그래도 형이라고 아우철회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하늘이 도왔다. 비가 그치고 서서히 물이 빠졌다. 그러나! 물은 빠졌으나 '잘 되던 구인상사'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천재지변(天災地變)이라 숙원숙우(宿怨宿憂)할 수가 없었다. 없는 돈에 은행 빚까지 내고 동생을 꼬셔 장사를 시작한 자신에 대한 자탄(自歎)밖에 할 일이 없었다.
위기와 시련
"이러고 있는 때가 아니다!"
구인회는 돈을 꾸어 다시 재기(再起)의 터전을 마련했다. 가을이 되자 광목은 없어서 못팔 정도여서 쉽게 재앙(災殃)에서 벗어났고, 은행에 적금을 들기 시작하면서 저축의 묘미를 터득하여 큰 돈을 모았다. 열심히 벌고 열심히 모으고, 모은 돈은 꼭 필요한 곳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는 것이 구인회의 용금(用金) 철학이었고, 이 철학은 오늘날 세계적인 대기업이 된 엘지의 철학이기도 하다. 나이 서른 살에 쟁쟁한 진주 유지들과 함께 상공위원이 되었고, 진주에서 주목 받는 형제로 부상했다.
그 당시 광목이나 비단에는 무늬가 없었다. 구인회는 생각 끝에 광목에 무늬를 넣고, 비단에 문양을 넣는 방법을 개발했고, 이러한 상품을 내놓자 구인상점은 손님이 떼를 지어 찾아와 떼돈을 벌었다. 장사에 있어서 남들이 팔지 않는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는 창의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고, 이 또한 그후 구인회가 세우는 락희와 금성, 그리고 오늘날 엘지의 기업 운영 방침의 근간이 되고 있다.
하루는 마산에 갔다. 민심이 흉흉했다. 곧 전쟁이 터진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전쟁이 터져? 전쟁이 터지면 어떻게 하지? 보통 사람 같으면 도망갈 궁리를 할 것이나, 구인회는 전쟁이 터지면 어떤 장사가 더 잘 될가를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에 전쟁이 터지면 물건이 귀해 옷감을 파는 포목장사는 더욱 잘 될 것 같았다.
큰 맘 먹고 광목 1천 짝을 샀다. 1천 짝이란 필 수로는 2만 필이고, 보통 사람은 감히 염두를 내지 못할 엄청난 양이었다. 소문대로 전쟁이 터졌다. 중일(中日) 전쟁이었다. 구인회의 예상은 적중했다. 다는 상점에는 물건이 동이났다. 구인회는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후히 광목과 비단을 팔면서 인심(人心)도 얻고 돈도 벌었다. 미래에 대한 예지력이 사업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가는 이 때에 실감한 구인회는 평생 점쟁이처럼 시국 변천에 대한 예지력과 변천을 뚫고 나갈 혜안을 번득이게 된다.
만주와 일본, 그리고 개안
조선과 만주 사이에 장사를 하던 선만물산에 약간 투자했던 구인회는 잠시 틈을 내어 만주로 갔다. 무역을 해볼가 하는 생각을 했다는 설이 있다. 진주의 한 좁은 골목에서 돈을 벌은 그이지만 만주에 가 보니 자신의 장사는 광활한 만주 대지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한 것을 통감하며 귀향한다. 문경에서 선생을 하던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가서 만주를 보고 느꼈다는 심정과 같았을 것이다. 만주는 한반도 남쪽 구석에 살던 구인회나 박정희의 뱃포를 키워준 땅임에 틀림없다.
일본에도 갔다. 양단과 뉴똥이라는 새로운 직물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진짜로 일본의 물건을 사다가 조선에 파는 무역상의 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배를 타고 현해탄을 나갔다. 엄청난 풍랑을 만났다. 배의 기관도 멈추었다. 아무런 방책이 없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 둘 중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의 위기였다. 구인회는 선창 밑으로 내려가 태연히 잠을 잤다.
배는 바람에 밀려 일본 어느 육지에 간신히 도착했다. 구인회의 구사일생이었다. 일본은 만주에 비할 바가 아닌 엄청난 규모로 큰 장사를 하는 '큰 손'들이 많았다. 조선반도에서 온 구인회같은 '작은 손'은 감히 대들지 못할 대대적인 무역업이 거기에 성행하고 있었다. 무역의 세계가 얼마나 큰 지를 실감했다.
진주에서 돈을 벌고 만주와 일본을 다녀온 구인회는 좀 더 큰 규모의 사업을 생각했다. 우선 구인회상점을 주식회사 구인상사로 개명했다. 무엇인가 좀 더 큰 사업을 펼치려면 주식회사 형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신상업주식회사에도 투자를 했다. 이로써 비단장수 구인회는 진주 경남 일대에서는 괄목할만한 사업가로 등장한다,
이 때에 한국과 만주를 강점한 일본 군국주의 자들은 '세계(世界)의 살인마(殺人魔)'가 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다. 진주만에 폭격이 감행되었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동안에 번 돈으로 이번에는 닥치는 대로 땅을 샀다. 그리고 삼천포에 가서 80톤 짜리 배를 한 척 사서 어업과 함께 인근 농산물을 수집하여 파는 어물 청과물 종합 판매업에 손을 대었다.
고향에서 진주로 나와 포목상을 해서 돈을 벌고, 만주와 일본을 관찰하며, 배를 사서 해운 유통 어업까지 장사의 범위를 넓힌 구인회였다. 슬하에 10남매가 성장하고 있었고, 아들 자경은 벌써 나이가 들어 결혼을 시켰다. 1942년의 일이다.
2. 생각! 생각!! 또 생각!!! 어느 그룹사의 사사(社史)를 감수할 때의 일이다. 시골에서 장사를 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정치에 관여하며 큰 그룹사를 형성한 과정의 글들을 읽어보며 나는 현기증을 일으켰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루 아침에 엄청난 기업 덩어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는지는 소상히 기록되어 있지 않고, 대개는 거두절미(去頭截尾)로 큰 대(大) 자(字) 대기업이 그 그룹 속에 수두룩하게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하루 아침에 솟고 돋아나 고 있었다. 이면(裏面)은 알 수 없는 우뚝 선 그룹이었다. 엘지의 창업자 구인회는 그런 사업가가 아니었다. 지금은 에아릴 수 없는 기업체들의 총칭으로 엘지라는 이름이 있지만, 그 기업체 하나 하나에 우애 좋은 형제들의 피와 땀과 생각이 깊이 배여 있는 그룹을 창업한 사람이 구인회이다. 구인회와 엘지는 '생각의 연결 고리'가 이루어 낸 기업 군단(群團)이다. 생각이 없으면 큰 기업가가 될 수 없고 맨날 그 타령이다. 한 가지 사업을 시작하면, 그 사업과 연결된 또 다른 사업으로 생각의 연결 고리를 넓혀 더욱 더 비즈니스의 영역을 높혀 더 큰 사업을 일구는 세포(細胞) 분열(分列) 방식(方式)의 기업 확창이 오늘의 엘지를 있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진주에서 구인상사로 돈을 번 구인회는 8.15 해방을 맞아 엉뚱한 구설(口舌) 수에 올라 환란(患亂)을 당한다. 구인회가 패망한 일본인의 앞잡이가 되어 일본인의 큰 기업체를 인수하고, 그 대가로 일본인들의 탈주(脫走)를 돕고 있다는 구설 수였다. 물론 이러한 구설로 인한 잠시 잠간 동안의 번민은 구인회를 시기하고 모략하는 자의 소행으로 밝혀져 그 다음에야 다리를 편하게 뻗고 마음 놓고 잠 수가 있었다. 장사의 규모가 커지고 보니 진주는 너무 좁은 땅이었다. 부산이나 서울 같은 넓은 도시에 나가 장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해방 후에 진주를 떠나 구인회가 자리를 잡은 곳이 부산이다. 아마도 이 때의 부산 택지(擇地)가 구인회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의미가 있는 결정이었는지 모른다. 만일 이 때에 서울로 가서 공장을 차리고 사업을 시작하였더라면 정부 수립 2년도 되지 않아 자행된 북한의 남침(南侵)으로 구인회의 재산은 병자년 홍수 때보다 더 큰 전쟁의 격랑(激浪)으로 일시에 침몰(沈沒)되었을 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부산에 온 구인회는 조선흥업사를 세우고 무역 허가를 받아 대마도로 가서 목탄을 사다가 팔려고 현해탄에 배를 몰았다. 또 풍랑이었다. 아마도 바다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배가 후꾸오카 근방에 표류했다. 애초에 계획했던 목탄은 사지 못하고 농기구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장사가 신통치 않았다. 서울 생각이 났다. 구인회는 구리무 5 백 타를 사서 서울로 가지고 올라갔다. 남대문 그 넓은 시장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70만원 어치가 금방 100만원의 현금으로 변했다. 구리므 장사는 참으로 할만한 장사였고, 비단 장수를 하던 구인회에게는 새로운 세계였다. 아우 정회가 심심해서 당구장에 갔다. 거기에 당구를 배우러 온 젊은이가 있었다. 마음씨 착한 정회가 당구 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당구장에서 나오며 정회가 그 친구에게 물었다. "당신 무엇하는 사람이요?" "구리므 공장에 다니는 기술자입니다." 구리무 공장 기술자? 부산으로 온 구 씨 집안에서 새사업을 구상하고 있을 때에 우연히 만난 귀인(貴人)이었다. 구리므 장사가 좋다는 것을 안 구인회는 전재산을 퍼부어 그 기술자에게 목을 매고 구리므공장을 세운다. 서울 구리므 행상에서 구리므 공장으로 생각의 연결 고리가 펼쳐진 셈이다. 마흔 한 살 때의 일이다. "상호를 무엇이라 할가?" 화장품은 서구적인 산물이다. 그래서 구리무를 만드는 화장품 회사 이름은 서구적이어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렇지! 그러면 어떤 이름이 있을가. "럭키라고 하지요." 럭키는 서양 말로 '행운'이라는 뜻이고, 한자(漢字)로 즐거울 락(樂) 자(字), 기쁠 희(喜) 자(字), 락희(樂喜)로 쓰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집에 락희화학공업사라는 간판을 달았다. 1947년의 일이다. 광고도 내야 하는데 광고 모델 사진도 이왕이면 이국적(異國的)인 서양 유명 여배우의 사진을 쓰기로 했다. 상호와 모델이 모두 서구적이고, 생산품마져 서구적이니, 생각의 연결 고리가 좋았고, 그러한 판단은 적중했다. 공장에서 500원에 내놓은 구리므가 시중에는 1천을 주고도 물건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락희화학의 구리므 장사를 하다가 밀수품 장사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 만큼 첫 제품은 품질이 우수하고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대성공이었다. 구리므 생산 원료는 글리세린이다. 그런데 후진 한반도에 글리세린이 있을 턱이 없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글리세린을 구할 수가 없었다. 락희 구리므가 좋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원료가 없으니 생산할 방법이 없었다. 큰 일이었다. 그 때에 일본인들이 공장에서 쓰다가 남기고 간 '쓸데 없는 글리세린'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무려 열 여섯 드럼이나 있었다. 천우신조였다. 구리므 공장이 팽팽 돌아갔다. 일손이 모자랐다. 부산사범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장남 자경이를 불러 공장에서 먹고 자며 일을 하도록 엄명(嚴命)을 내렸다. 어려서부터 곰실곰실 자란 자경은 아버지 말이라면 꼼짝하지 못하는 효자였다. 구리므는 엄청나게 팔려 나가는데 문제가 있었다. 포장 용기가 사기 제품이라 뚜껑이 깨지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다. 혹시 깨지지 않는 뚜껑을 만들 수는 없을가. 다시 생각의 나래를 펼쳐 보았다. 아우 태회가 미8군 피엑스에서 파는 것을 보니 플라스틱 제품이 있더라고 했다. 풀라스틱이 무엇인지 아는 한국인이 없을 때다. 이 때에 이병철이 원당을 수입하여 팔자는 제의가 있었으나 구인회는 수입 보다 생산업에 관심이 많아 손을 잡지 않았다. 구인회의 머리에는 플라스틱이라는 이상한 물체에 온정신이 다 가 있었다. 옳다! 그거로 하자! 그거로 하면 깨지지 않겠지! 아우에게 책을 구해 플라스틱에 관해 읽도록 하고, 구리므 장사로 번 돈을 투입하여 플라스틱 사출 기계와 원료를 들여왔다. 공장 규모는 아홉 평, 1951년 전쟁통이었다. 시운전을 하는 날이었다. 비싼 돈으로 사 온 기계가 돌아가지를 안했다. 왜 그럴가. 모든 사람들이 전전긍긍했다. 아버지 옆에서 보고 있던 자경이가 '전력이 부족하여 그런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변압기를 구해다가 승압(昇壓)시킨 후에 기계를 돌려보니, 기계는 잘도 돌아가고, 돌아가는 구멍마다 플라스틱 용기들이 잘도 쏟아져 나왔다. 또 대성공이었다. 플라스틱 구리므 뚜껑 생산에 성공한 럭키는 또 다시 '생각의 연결 고리'를 가동했다. 이 좋은 플라스틱으로 더 생산해낼 또 다른 제품을 찾는 일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나무로 만든 참빗과 대나무에 돼지털을 박은 칫솔을 쓰고 있었다. 한국 기업인이나 한국인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플라스틱이란 요즘 보는 바와 같이 일상 생활 용품뿐만 아니라 수 많은 공산품들의 주요 원료이다. 깨지지 않은 구리므 플라스틱 뚜껑을 만든 락희는 플라스틱 쓰임새의 연결 고리에 따라 오늘까지 승승 장구하고 있고, 이런 제품이 앞으로 21세기에는 어떤 형태로 얼마나 발전할 지 아직도 아무도 예상치 못할 '황금 방망이'이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오리엔탈 머릿빗'과 '럭키 칫솔'이 시중에 나와 날개가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2천만 남한 인구 한 사람마다 칫솔을 하나씩 써야 하고, 사람마다 집집마다 각지 각종 각생의 머릿빗을 사야하니, 그 양이 얼마나 방대했을가. 락희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완벽한 성공이었다. 구인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생각의 연결 고리를 펼쳐 비누갑이라는 새로운 플라스틱 제품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대히트였다. 돈은 버는 것이 아니라 모여드는대로 담기만 하면 되는 판이었다. 부전동으로 공장을 확장 이전하고, 범일동 일대에 미래에 쓸 수 만 평의 공장 부지도 이 때에 마련하였다. 칫솔 생산은 자연적으로 치약 생산으로 생각이 발전해 갔다. 대개는 소금을 쓰거나 가루치약을 쓰던 사람들이 미국 콜게이트를 본 딴 럭키 치약을 시판하자, 그 향기와 그 거품과 그 개운한 맛에 하루 아침에 집집마다 럭키 치약이 들어왔다. 치약 공장은 소규모이기는 하였으나 연지동에 있었다. 치약에 성공한 락희는 비누에 손을 댄다. 미제 비누를 사다가 칼로 깎으며 연구를 거듭하여 나온 '럭키 비누'도 나오자마자 동이났다. 이렇게 생각의 고리에 연결에 연결을 거듭한 락희화학은 성공에 성공을 거듭한다. 굳건한 사업의 터전을 잡은 구인회는 엉뚱하게 남이 하지 않는 사업을 해보자는 생각을 한다. 홍콩을 거쳐 유럽과 미주를 두어달 시찰하고 돌아온 구인회는 전자 사업체인 금성사를 1958년에 세워 '골든 스타'라는 진공관 라디오 조립 생산 사업을 시작했다. 4.19와 5.16이라는 정치적 변혁기를 거치면서 한 때 부정축재자로 몰려 피신 생활까지 한 구인회는 '농촌라디오보내기운동'의 파도를 타고 또 한번 도약한다. 이어서 전화기 선풍기 등의 전자 제품의 생산 분야가 넓어지고, 시장 또한 국내에서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 유럽 미주로 넓어졌다. 오늘의 엘지는 이렇게 락희화학이라는 기둥과 금성사라는 두 개의 기둥을 근간으로 한국과 세계에 '큰 기업'으로 우뚝 서 있다. 이를 상징이라도 하는 듯 수도 서울 한복판의 여의동에는 럭키그룹의 쌍둥이빌딩이 24 시간 불을 밝히고 있다. 구인회, 그는 점점 나이가 들어가도 엘지, 그의 사업은 점점 힘을 내는 막강한 재벌 그룹으로 세상과 세계에 부상한다. 3. 연암과 호암 럭키금성사의 연암 구인회와 삼성그룹의 호암 이병철은 동향(同鄕)이고 사돈 간이며 같은 재계의 거성(巨星)들이다. 모처럼 둘이 한 자리에 앉았다. "연암! 언론 사업을 합시다." "언론 사업이라니요, 호암이나 하시지요." "아닙니다. 같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여 한국 최대 재벌 두 사람이 신문 방송 티비 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투자 비률은 50대 50의 동일 비률이었다. 언론 사업에 별 관심이 없던 구인회로서는 사돈 이병철의 설득에 의하여 참여한 사업이었다. 1960년대 초만해도 우리나라에 방송국이라면 국영방송인 KBS가 있을 뿐 민간 방송의 불모지였다. 그 때에 금성은 한국에도 미구에 텔레비젼 방송이 일반화 될 것으로 예견하고 텔레비젼 수상기 생산에 깊히 개입하고 있었다. 마침 그런 때에 호암의 제의가 있어 연암은 순수히 뜻을 같이 했다. 1964년 5월이다. 삼성(三星)과 금성(金星), 두 별이 손을 잡고 서울방송이라는 라디오 전파를 발사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동양방송이라는 TBC 텔레비전 방송국을 개국하였다. 라디오와 텔레비젼 전파가 동시에 발사되자 양사의 창업주들의 마음은 정말 하늘의 '별'을 딴 듯 기뻤다. 창업은 오너의 뜻으로 되는 것이지만 운영은 역시 실무자들이 하는 것이다. 양사의 실무자들이 업무 추진을 위하여 모이면 배가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원만한 합의 도출(導出)이 불가능했다. 그러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고, 다음 해 주주 총회와 이사회에서 금성은 삼성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텔레비젼 방송국은 맡으라는 제의였다. 럭키금성은 난감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말만 텔레비젼 방송이지 수상기가 없어 보는 사람의 수가 극히 제한되어 있고, 광고 수입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였다. 서울에 5만대, 부산에 8천대가 고작이었다. 이 판에 텔레비젼 방송국을 홀로 맡는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나 당시 럭키금성의 입장으로는 숨찬 일이었다. 텔레비젼 방송국의 모든 기자재들은 수입해와야 했다. 그러나 혼자의 재력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구인회는 고민에 빠졌다. 서로 좋은 사이가 사업 때문에 금이 가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어렵지만 삼성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 결과 서울라디오는 삼성이 하고, 동양텔레비젼방송은 럭키금성이 하기로 하고, 서로 정산(定算)을 하기로 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돈을 마련하여 삼성의 실무자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또 이변이 생겼다. 삼성은 약속 장소에 나와 돈은 받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뒤에서 이상한 싸인을 보내고 있었다. 라디오방송처럼 텔레비젼방송에서도 손을 떼는 것이 어떠냐는 싸인이었다. 구인회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병철을 만났다. 담판이었다. "호암! 결손이 큰 텔레비젼방송을 넘겨주려면 라디오방송국의 청산 차액을 빨리 정리하세. 만일 둘 다 하고 싶다면 텔레비젼방송국도 그 쪽에서 하게. 이거 세상 창피해서 살겠나. 양가 양대 재벌간에 싸움판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하여 얼굴을 들 수 없고, 거기다가 양가 사이에서 태어난 손주들을 보기가 부끄럽네. 내가 이 손주들에게 할아버지들이 사업 때문에 싸웠다는 말을 남겨 줄 수는 없네. 호암. 어떻게 생각하나? 결론을 내게." "그대로 같이 해 보지....." 호암의 말이었다. 연암은 한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불편한 관계는 여기에서 끝을 내야 하네. 자네가 다 하게." 이리하여 럭키금성은 언론 사업이라는 호랑이 사냥에 나서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가 호랑이 가죽만 잠시 만고 급히 뛰쳐 나왔다. 그 때의 고민에 빠져 있던 럭키금성의 창업자 구인회의 모습은 자식들마져 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가 아들을 불렀다.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세상이 깨어질 것 같은 정막의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드디어 긴 한숨과 함께 빛나는 눈동자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조용히, 아주 조용히 구인회는 입을 열었다. "사람 있고 사업 있지, 사업 있고 사람 있나....사업보다 사람이 중요하다. 사업보다 인화(人和)가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사업을 포기하고 인화를 택했다." 이 말은 LG그룹으로 개칭된 럭키금성이 지금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고 있는 인본(人本) 인화(人和) 정신의 모태(母胎)가 되었다. 라디오 방송국을 버리더라도, 미래에 황금알을 낳을 텔레비젼 방송국을 내던지더라도 사람, 사돈, 손자들은 버릴 수 없다. 구인회는 사업은 버리더라도 사람들끼리는 서로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말을 독백(獨白)처럼 되씹으며 다시 말문을 닫았다. 창업자 구인회나 창업 2세 구자경, 그리고 럭키금성으로서는 유쾌한 기억이 아니다. 그래서 타의에 의하여 시작했던 언론 사업은 타의에 의하여 끝이 난 셈이다. 어차피 끝이 날려면 빨리 끝난 것이 어떤 면에서는 좋았다. 그 사업은 결국 제5공화국 전야에 군부 통치지들의 억압으로 사돈 이병철도 손을 떼게 된다. 모든 재벌들의 속성이 다 그런 것처럼 엘지 또한 자기 전문 분야만은 다른 재벌에게 자리를 넘겨 주지 않는다는 불문율(不文律)을 가지고 있다. 그런 불굴의 정신과 인내와 추구로 금성사는 1958년 창업 이래 1980년대 초까지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전기 전자 업계의 선두(先頭) 주자(走者)였다. 그런 판에 사돈 회사인 삼성이 1969년에 삼성전자를 설립했다. 금성은 뛰어 봤자 벼룩이 아니더냐는 심산(心算)으로 전자 업계의 신생아(新生兒)인 삼성을 의식하지 않았다. 자만은 기업을 망친다. 금성의 자만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10 여 년이 지났다. 1982년 말이었다. 경남북에서 삼성은 금성을 앞지르고 있었다. 경쟁 사회에서 '앗차' 소리가 날 때는 이미 늦은 때다. 후발 주자 삼성이 앞질러 가는 것을 보고 금성은 소스라쳐 놀라 정신을 가다듬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삼성은 그 때부터 선두 주자이던 사돈 회사 금성을 따돌리고 줄달음을 치고 있다. 금성의 자만에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엘지는 지금도 그 점을 뼈아프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인 기업이 많다. 삼성 현대 대우 엘지 그 누구도 이제는 국내용만의 기업이 아니다. 그런 우리나라의 재계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누가 한국 재계의 시조(始祖)이며, 누가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이냐를 놓고 소위 눈에 보이지 않는 자존심과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 때 럭키금성은 자기들이 한국 재계의 시조이며, 한국의 대표적인 주자라는 말을 서슴치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힘을 쓰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 연대나 세력 판도 변천사를 보면 한 때 그런 럭키금성의 주장이 전적으로 과잉 포장된 내용만은 아니었을 때도 있다. 한 번 내 준 선두(先頭), 한 번 내준 사업, 한 번 내준 집터를 다시 찾기는 힘들다. 인간 사회에는 '영원'이라는 것이 없고, '100년'이라는 말도 그리 흔치 않다. 기업의 수명이 30년이라는 설도 상당한 설득력과 통계상의 정확성을 가지고 있다. 1952년 세계 100대 기업에 랭킹되었던 70 여 개의 기업이 23년이 지난 1975년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통계를 구자경의 그의 저서 '오직이길밖에없다'에 인용한 바 있다. 그러나 엘지는 이미 창업 50년이 넘었고, 지금은 세계를 향한 도약대에서 점핑을 계속하고 있다. 창업 제1세에서 제2세를 거쳐 창업 제3세대에 접어든 엘지는 인화(人和)와 인본(人本)이라는 팻말을 높히 들고 21세기 세계를 향한 지구촌 도처의 약진 계속한다.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고 다시 엘지 탄생 100 주년을 맞을 때에 엘지는 한국 재계나 세계 재계 속에서 어떤 위상(位相)을 찾이하고 있을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가 되면 엘지라는 시아이 앞에 차이니스 레터 대(大) 자를 붙이 대엘지(大LG)나 더 그레이트 엘지(The Great LG)라는 신생어가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그 때가 되면 인간은 정말로 지상의 엘지가 아니라 우주 공간 속에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極致)인 금성(Golden Star)에 실제로 착륙하는 럭키 휴맨들이 될지도 모른다. 그 때가 되면 엘지는 지상의 엘지뿐만 아니라 천상에서도 엘지, 럭키 골든 스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