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방천시장 신문팔이
내가 추천하는 사티트에 야후 톱 100과 웹 톱 100, 그리고 인터넷 톱 100이라는 사이트가 있다. 말은 쉽고 추천하기는 쉽지만 따지고 보면 우주 공간을 맴돌고 다니는 전파 세상에서 어떤 분야거나 톱 100을 랭킹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나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 같이 톱 1000이라는 또 다른 류의 사이트를 소개하고 있다. 야후나 인터넷이나 웹에서 톱 1000 이내에만 들어도 이 시대의 최고의 영과이요 총아(寵兒)이다.
인터넷이나 웹, 또는 야후 같은 곳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 사회에도 세계 톱 100이니, 톱 500이니, 톱 1000이니 하는 일들이 매일 같이 벌어지고 있다. 끄덕하면 세계 제일을 말하는 우리들이지만 실제로 세계 제일은 고사하고 세계 100위니, 500위니, 1000위니 하는 자리를 찾이하기도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 그 어려운 일을 '단기간' 내에 해낸 사람이 우리나라에 있다.
대우그룹을 창업한 김우중이 바로 그 사람이다. 유난히 일찍 머리가 빠지고 백발이 된 사람이다. 신경을 많이 쓰면 그렇게 된다더니, 아마도 김우중, 그가 그런 사람인지 모른다. 김우중은 2000년대 전야에 지구촌 집집마다 도깨비처럼 나타나 난리를 피우고 있는 컴퓨터라는 괴기(怪機)에 매달려 돈방석에 올라앉은 '컴퓨터의 황제' 빌 게이츠를 빼고나면, 이 시대에 창업 30년만에 담박에 세계 재계 랭킹 500위 안에 오른 사람은 그 유례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김우중이 대우를 창업한 것은 1967년이었다. 작년에 창업 30년이 되었다. 자본금 500만원에 다섯 사람이 창업한 회사였다. 대우의 창업자 김우중은 경고등학교를 나와 연세대를 다니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한성실업이라는 회사에 들어가 무역 업무를 보던 회사원 출신이다.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전라도 사람으로 제주도지사까지 한 분이나 납북되어 어려서부터 홀머머니 밑에서 5남매가 가난하게 자랐다.
어린 시절의 대구 생활은 피눈물 나는 고생의 세월이었다. 김우중은 그 때를 그의 일생 중에 가장 값진 세월로 떠올리고 있다. 왜 그럴가. 너무나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그 때 이미 어린 김우중은 질펀한 대구 방천 시장 바닥에 뛰어들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용기를 잃지 않고, 반짝이는 지혜를 동원하여 남보다 '더 빨리 먼저 뛰고 일하는' 소년이었다.
그 때의 김우중이 방천 시장에서 한 일이 신문파리(팔이)이다. 지금 세상은 봉건주의의 껍질과 타성이 남지 않아 이발하는 사람도 이발사(理髮師)라 하고, 운전하는 사람도 운전사(運轉士)라 하여, 스승 사(師) 자와 선비 사(士) 자가 남발된 세상이지만, 그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쟁이'이와 '파리'와 같은 남을 하대(下待)하는 말들이 많이 통용되던 세상이다. 당시 한국 기계 산업의 대표라 할 수 있던 대장간에 일하는 사람은 요즘처럼 존경 받는 산업 전사가 아니라 '대장쟁이'가 되어야 했고, 조간 석간으로 나누어져 발행하는 신문을 아침 저녁으로 팔러 다니는 아이들은 '신문 배달 소년'도 아닌 천대 받는 인간으로 아무 쓸데 없는 '신문파리'가 되어야 했다.
전국민의 75 퍼센트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던 때다. 봄만 되면 식량 걱정이 태산 같은 보리고개가 있었다. 도시에는 굶지 않으려고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이 즐비했다. 수 백년 내려온 관존민비(官尊民卑) 남존여비(男尊女卑) 타성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산업은 전혀 발달되지 않은 상태였다. '여자'나 신문 배달하는 소년 정도는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는 소모품 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고생 속에 낙(樂)이 있다는 말은 고생 속에 성공이 있다는 말로 바꿔야 한다. 신문 배달 소년으로 정계에서 가장 출세한 사람은 아마도 대통령까지 역임한 전두환일 것이고, 경제계에서 가장 출세한 사람은 김우중일 것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신문 배달 출신들의 성공률이 높은 이유가 있다. 우선 신문 배달은 남보다 부지런해야 하고, 조간 신문인 경우에는 신새벽에 모두 배달해 놓아야 한다. 그런 어려움 속에 남보다 일찍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새벽의 철학'을 배운 소년들이 성장하여 성공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하다.
김우중은 하루에 100부의 신문을 팔아야 호구지책(糊口之策)을 해결할 수 있는 '소년 가장(家長)'이었다. 100부를 사다가 다 파는 날은 그래도 조금은 남고, 다 팔지 못하는 날은 밑지는 '장사'를 해야 했다. 신문 배달 사회를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은 배달 소년들에게 이런 '올가미'가 씌워져 있는 것을 모른다.
김우중은 100장의 신문을 사들자 마자 방천시장으로 뛰었다. 남보다 빨리 가서 한 부라도 더 많이 팔아야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줄다름 쳐서 아무리 일찍 시장에 가 이 집 저 집 신문을 넣어 주더라도 또 다른 녀석이 다른 골목으로 뛰어 들어와서 신문을 넣고 갔다. 세상 도처가 경쟁 사회이다. 신문 배달 사회라고 방천 시장 전부가 김우중 소년의 것일 수가 없다.
김우중은 다른 아이들이 오기 전에 100부를 모두 넣을 수가 없을가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거스름 돈이 원수였다. 신문을 주고, 돈을 받고, 거스름 돈을 주고 하다 보니 배달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을 알았다. 소년 김우중은 그 뒤에 거스름 돈은 세모꼴로 미리 접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신문을 배달했다. 그러고 보니 상당히 시간이 절략되었다.
그러나 거스름 돈을 미리 준비해 가지고 다녀도 능률에는 한계가 있었다. 전보다 조금 더 팔 수는 있느나 다른 아이들이 나타나기 전에 다 팔 수는 없었다. 이를 어쩔가. 김우중은 고민에 빠졌다. 100 장은 팔아야 집에 약간의 돈을 떼어 주고, 나머지 돈으로 다음 날에 다시 100장을 사서 팔아야 생계가 유지된다. 그런 판에 항상 몇 부씩 남는다는 것은 고민 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고민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뾰족한 해결 방법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소년 김우중의 머리에 번쩍!하는 아이디어가 스쳐 갔다. 아하! 그거다! 김우중은 그 날부터는 돈을 받거나 거스름 돈을 줄 생각은 하지도 않고, 무조건 뛰어가서 집집마다 신문을 넣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돌아오면서 신문값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방천 시장 전부가 소년 김우중의 것이었고, 설령 돌아오는 길에 돈을 떼어 먹고 간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팔지 못해 남는 것 보다는 다 파는 것이 좋았다.
남다른 아이디어 하나가 그를 살리고 그의 가정에서 걱정을 몰아냈다. 아이디어! 김우중은 지금도 번쩍이는 아이디어를 찾으며 대구 방천 시장을 뛰어 다닐 때보다 더 빠르게 그가 말한 '넓은 세상'과 '할 일 많은 세상'을 누비고 다닌다. 그리하여 2.000년에는 세계 1.000 곳에 대우의 기지(基地)를 세운다고 한다. '신문파리' 김우중의 승리요, 월급쟁이 출신 사업가의 승리요, 한국인의 승리이다.
2. 아름다운 거짓말 거짓말을 하지 말라! 이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고,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는 모든 어른들과 모든 선지자들이 하나 같이 권고하는 인생의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거짓말이라니! 정말이다. 세상에는 하느님도 하나님도 예수님도 부처님도 눈물을 흘릴 아름다운 거짓말이 있다. 신(神)이 눈물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다운 거짓말이 비단 김우중의 주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이곳에서는 김우중의 예를 들어보자. 김우중은 자기 인생에서 어머니와 스승과 친구가 준 영향이 크다는 말을 했다. 대구에서 서울에 올라와 당시 한국 최고 수준인 경기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김우중은 문자 그대로 우수(優秀)하고 선량(善良)한 학생만은 아니었다. 복싱도 좋아하고 때로는 어둠의 뒷골목도 다닌 경험이 있는 신통치 않은 청소년이었다. 친구가 좋았다.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지만 이런 우중이를 맞아 시험 공부를 같이하고, 공부의 진미를 느끼게 같이 놀아주고 공부해준 단짝이 있었다.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자신이 공부의 맛을 알았을가 하는 점에 대하여 심한 의구심을 제기한 바가 있다. 그래서 그는 친구가 좋다는 말을 자주 한다. 특히 대우를 창업하면서 앞길이 창창한 좋은 직장에 근무하던 친구들이 뜻을 모아 같이 일을 시작해 준 우정을 평생을 통하여 가슴 깊히 묻고 산다. 김우중을 특별히 생각하는 선생이 한 분 있었다. 다른 분들은 공부를 잘 하지 않는다고 눈총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그 선생님은 김우중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도 낙제를 한 경험이 있고, 에디슨도 학교에서 쫓겨난 일이 있으며, 박정희도 꼬등을 한 일이 있는 세상이다. 학생이란 본디 공부를 잘해야 하지만 공부를 못한다고 스승된 자가 학생을 버려서는 안된다. 약간 문제가 있을 법한 김우중에게 선생님은 규율부장을 시켰다. 파격(破格)이었다. 파격이란 격(格) 중에서 가장 높은 격을 말한다. 김우중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더 이상 나쁜 학생이나 문제가 있을 법한 학생이 될 수가 없었다. 규율부장이란 직책이 그의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타(他)의 모범이 되게 했다. 순전히 김우중을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선생님의 고등 전략이 아니었으면, 다른 선생들이 미쳐 눈치채지 못한 김우중의 몸 속에 숨어 있는 탁월한 능력을 미리 알아차랜 선생님의 발탁이었는지 모른다. 혜안이었다. 그 때의 김우중 속에는 오늘의 김우중과 같은 능력이 숨어 있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에 친구와 스승의 덕을 보았다는 김우중의 생애에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다섯 남매를 대학까지 가르친 현모(賢母)였다. 늘 성경(聖經)과 찬송(讚頌)과 기도(祈禱)로 사시던 분이다.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어머니, 찬송을 부르며 어려운 삶을 달래는 어머니, 기도를 하며 자식들의 장래를 기원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김우중은 매일 같이 아침 저녁으로 보며 자랐다. 어머니!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영향을 주신 어머니이다. 대구 방천 시장 시대의 김우중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머니는 매일 같이 신문을 팔고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그를 동생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이 돌아오면 그 때서야 저녁상을 차려놓고 온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간혹 어떤 날은 어머니만 기다리고 동생들은 자고 있었다. 어머니는 집에 돌아온 아들에게 밥상을 차려 왔다. 그런데 밥은 한 그릇뿐이었다. "어머니, 잡수세요." "아니다. 나는 아까 너를 기다리다가 동생과 함께 먼저 먹었다. 시장하겠다. 어서 먹어라."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늦게 집에 돌아와도 어머니와 동생들과 같이 먹던 밥상이다. 그런데 오늘은 왜 그렇지 않을가. 동생은 누어 자고 어머니는 미리 밥을 드셨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밥 그릇 하나, 그것은 그날 저녁 김우중가(家)의 단 한 그릇밖에 없는 식량의 전부였다. "어머니가 잡수세요. 저는 집에 돌아오다가 너무 늦어서 길 거리에서 풀빵을 좀 사먹고 왔어요. 저는 배가 고프지 않아요. 드세요, 어머니! 어서 드세요." 아들과 어머니는 밥 한 그릇을 놓고 이렇게 서로 먹으라고 눈물겨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나오는 풀빵이란 무엇인가. 풀빵이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밀가루를 풀처럼 멀겋게 풀고 단맛을 내기 위하여 지금은 발암(發癌) 물질로 알려진 사카린을 약간 넣어 달게 구어낸 빵을 말한다. 풀빵이 발전하여 국화빵이 되었고, 국화빵이 발전하여 오늘의 '붕어빵'이 되었다.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만 위대하고 아름다운 성모가 아니다. 자식을 생각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성모이고 마리아이고 모성애(母性愛)의 극치(極致)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여인들이다. 그 아름다운 여인들과 착한 자식들 사이에는 오늘 이 밤도 '아름다운 거짓말'이 오고 간다. 누가 아름다운 이 거짓말을 하지 말라 할 것이며, 누가 이 아름다운 거짓말을 나쁘다 할 것인가. 이런 눈물겨운 거짓말의 한 때를 겪지 못한 사람은 이 눈물겨운 아름다운 거짓말의 세계를 모를 것이다. 사랑의 거짓말, 아름다운 거짓말, 그것이 김우중의 가슴에 맺혀 비즈니스 세상의 문을 열게 하였다. 남들처럼 배불리 먹고 편히 사는 유복한 가정의 아들이었다면 구테어 돈을 벌겠다고 사업계에 뛰어들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춥고 배고팠다는 말을 빼고 김우정은 청소년 시절을 회상할 수 없다. 배고픔과 굶주린, 그것은 김우중을 성공으로 이끈 또 하나의 어머니요 스승이요 벗이다. 그래서 그는 돈이 보이는 세상을 찾아 나섰고, 이제는 가는 곳마다 돈이 보이는 세계적인 '돈 도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