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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Info)

인물탐구-아직도 쓰고계십니까? TV개혁 대우회장 김우중

1. 방천시장 신문팔이 








내가 추천하는 사티트에 야후 톱 100과 웹 톱 100, 그리고 인터넷 톱 100이라는 사이트가 있다. 말은 쉽고 추천하기는 쉽지만 따지고 보면 우주 공간을 맴돌고 다니는 전파 세상에서 어떤 분야거나 톱 100을 랭킹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나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 같이 톱 1000이라는 또 다른 류의 사이트를 소개하고 있다. 야후나 인터넷이나 웹에서 톱 1000 이내에만 들어도 이 시대의 최고의 영과이요 총아(寵兒)이다.

인터넷이나 웹, 또는 야후 같은 곳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 사회에도 세계 톱 100이니, 톱 500이니, 톱 1000이니 하는 일들이 매일 같이 벌어지고 있다. 끄덕하면 세계 제일을 말하는 우리들이지만 실제로 세계 제일은 고사하고 세계 100위니, 500위니, 1000위니 하는 자리를 찾이하기도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 그 어려운 일을 '단기간' 내에 해낸 사람이 우리나라에 있다.

대우그룹을 창업한 김우중이 바로 그 사람이다. 유난히 일찍 머리가 빠지고 백발이 된 사람이다. 신경을 많이 쓰면 그렇게 된다더니, 아마도 김우중, 그가 그런 사람인지 모른다. 김우중은 2000년대 전야에 지구촌 집집마다 도깨비처럼 나타나 난리를 피우고 있는 컴퓨터라는 괴기(怪機)에 매달려 돈방석에 올라앉은 '컴퓨터의 황제' 빌 게이츠를 빼고나면, 이 시대에 창업 30년만에 담박에 세계 재계 랭킹 500위 안에 오른 사람은 그 유례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김우중이 대우를 창업한 것은 1967년이었다. 작년에 창업 30년이 되었다. 자본금 500만원에 다섯 사람이 창업한 회사였다. 대우의 창업자 김우중은 경고등학교를 나와 연세대를 다니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한성실업이라는 회사에 들어가 무역 업무를 보던 회사원 출신이다.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전라도 사람으로 제주도지사까지 한 분이나 납북되어 어려서부터 홀머머니 밑에서 5남매가 가난하게 자랐다.

어린 시절의 대구 생활은 피눈물 나는 고생의 세월이었다. 김우중은 그 때를 그의 일생 중에 가장 값진 세월로 떠올리고 있다. 왜 그럴가. 너무나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그 때 이미 어린 김우중은 질펀한 대구 방천 시장 바닥에 뛰어들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용기를 잃지 않고, 반짝이는 지혜를 동원하여 남보다 '더 빨리 먼저 뛰고 일하는' 소년이었다.

그 때의 김우중이 방천 시장에서 한 일이 신문파리(팔이)이다. 지금 세상은 봉건주의의 껍질과 타성이 남지 않아 이발하는 사람도 이발사(理髮師)라 하고, 운전하는 사람도 운전사(運轉士)라 하여, 스승 사(師) 자와 선비 사(士) 자가 남발된 세상이지만, 그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쟁이'이와 '파리'와 같은 남을 하대(下待)하는 말들이 많이 통용되던 세상이다. 당시 한국 기계 산업의 대표라 할 수 있던 대장간에 일하는 사람은 요즘처럼 존경 받는 산업 전사가 아니라 '대장쟁이'가 되어야 했고, 조간 석간으로 나누어져 발행하는 신문을 아침 저녁으로 팔러 다니는 아이들은 '신문 배달 소년'도 아닌 천대 받는 인간으로 아무 쓸데 없는 '신문파리'가 되어야 했다.

전국민의 75 퍼센트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던 때다. 봄만 되면 식량 걱정이 태산 같은 보리고개가 있었다. 도시에는 굶지 않으려고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이 즐비했다. 수 백년 내려온 관존민비(官尊民卑) 남존여비(男尊女卑) 타성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산업은 전혀 발달되지 않은 상태였다. '여자'나 신문 배달하는 소년 정도는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는 소모품 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고생 속에 낙(樂)이 있다는 말은 고생 속에 성공이 있다는 말로 바꿔야 한다. 신문 배달 소년으로 정계에서 가장 출세한 사람은 아마도 대통령까지 역임한 전두환일 것이고, 경제계에서 가장 출세한 사람은 김우중일 것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신문 배달 출신들의 성공률이 높은 이유가 있다. 우선 신문 배달은 남보다 부지런해야 하고, 조간 신문인 경우에는 신새벽에 모두 배달해 놓아야 한다. 그런 어려움 속에 남보다 일찍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새벽의 철학'을 배운 소년들이 성장하여 성공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하다.

김우중은 하루에 100부의 신문을 팔아야 호구지책(糊口之策)을 해결할 수 있는 '소년 가장(家長)'이었다. 100부를 사다가 다 파는 날은 그래도 조금은 남고, 다 팔지 못하는 날은 밑지는 '장사'를 해야 했다. 신문 배달 사회를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은 배달 소년들에게 이런 '올가미'가 씌워져 있는 것을 모른다.

김우중은 100장의 신문을 사들자 마자 방천시장으로 뛰었다. 남보다 빨리 가서 한 부라도 더 많이 팔아야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줄다름 쳐서 아무리 일찍 시장에 가 이 집 저 집 신문을 넣어 주더라도 또 다른 녀석이 다른 골목으로 뛰어 들어와서 신문을 넣고 갔다. 세상 도처가 경쟁 사회이다. 신문 배달 사회라고 방천 시장 전부가 김우중 소년의 것일 수가 없다.

김우중은 다른 아이들이 오기 전에 100부를 모두 넣을 수가 없을가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거스름 돈이 원수였다. 신문을 주고, 돈을 받고, 거스름 돈을 주고 하다 보니 배달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을 알았다. 소년 김우중은 그 뒤에 거스름 돈은 세모꼴로 미리 접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신문을 배달했다. 그러고 보니 상당히 시간이 절략되었다.

그러나 거스름 돈을 미리 준비해 가지고 다녀도 능률에는 한계가 있었다. 전보다 조금 더 팔 수는 있느나 다른 아이들이 나타나기 전에 다 팔 수는 없었다. 이를 어쩔가. 김우중은 고민에 빠졌다. 100 장은 팔아야 집에 약간의 돈을 떼어 주고, 나머지 돈으로 다음 날에 다시 100장을 사서 팔아야 생계가 유지된다. 그런 판에 항상 몇 부씩 남는다는 것은 고민 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고민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뾰족한 해결 방법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소년 김우중의 머리에 번쩍!하는 아이디어가 스쳐 갔다. 아하! 그거다! 김우중은 그 날부터는 돈을 받거나 거스름 돈을 줄 생각은 하지도 않고, 무조건 뛰어가서 집집마다 신문을 넣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돌아오면서 신문값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방천 시장 전부가 소년 김우중의 것이었고, 설령 돌아오는 길에 돈을 떼어 먹고 간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팔지 못해 남는 것 보다는 다 파는 것이 좋았다.

남다른 아이디어 하나가 그를 살리고 그의 가정에서 걱정을 몰아냈다. 아이디어! 김우중은 지금도 번쩍이는 아이디어를 찾으며 대구 방천 시장을 뛰어 다닐 때보다 더 빠르게 그가 말한 '넓은 세상'과 '할 일 많은 세상'을 누비고 다닌다. 그리하여 2.000년에는 세계 1.000 곳에 대우의 기지(基地)를 세운다고 한다. '신문파리' 김우중의 승리요, 월급쟁이 출신 사업가의 승리요, 한국인의 승리이다. 


2. 아름다운 거짓말 







거짓말을 하지 말라! 이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고,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는 모든 어른들과 모든 선지자들이 하나 같이 권고하는 인생의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거짓말이라니! 정말이다. 세상에는 하느님도 하나님도 예수님도 부처님도 눈물을 흘릴 아름다운 거짓말이 있다. 신(神)이 눈물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다운 거짓말이 비단 김우중의 주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이곳에서는 김우중의 예를 들어보자.

김우중은 자기 인생에서 어머니와 스승과 친구가 준 영향이 크다는 말을 했다. 대구에서 서울에 올라와 당시 한국 최고 수준인 경기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김우중은 문자 그대로 우수(優秀)하고 선량(善良)한 학생만은 아니었다. 복싱도 좋아하고 때로는 어둠의 뒷골목도 다닌 경험이 있는 신통치 않은 청소년이었다.

친구가 좋았다.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지만 이런 우중이를 맞아 시험 공부를 같이하고, 공부의 진미를 느끼게 같이 놀아주고 공부해준 단짝이 있었다.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자신이 공부의 맛을 알았을가 하는 점에 대하여 심한 의구심을 제기한 바가 있다. 그래서 그는 친구가 좋다는 말을 자주 한다. 특히 대우를 창업하면서 앞길이 창창한 좋은 직장에 근무하던 친구들이 뜻을 모아 같이 일을 시작해 준 우정을 평생을 통하여 가슴 깊히 묻고 산다.

김우중을 특별히 생각하는 선생이 한 분 있었다. 다른 분들은 공부를 잘 하지 않는다고 눈총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그 선생님은 김우중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도 낙제를 한 경험이 있고, 에디슨도 학교에서 쫓겨난 일이 있으며, 박정희도 꼬등을 한 일이 있는 세상이다. 학생이란 본디 공부를 잘해야 하지만 공부를 못한다고 스승된 자가 학생을 버려서는 안된다.

약간 문제가 있을 법한 김우중에게 선생님은 규율부장을 시켰다. 파격(破格)이었다. 파격이란 격(格) 중에서 가장 높은 격을 말한다. 김우중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더 이상 나쁜 학생이나 문제가 있을 법한 학생이 될 수가 없었다.

규율부장이란 직책이 그의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타(他)의 모범이 되게 했다. 순전히 김우중을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선생님의 고등 전략이 아니었으면, 다른 선생들이 미쳐 눈치채지 못한 김우중의 몸 속에 숨어 있는 탁월한 능력을 미리 알아차랜 선생님의 발탁이었는지 모른다. 혜안이었다. 그 때의 김우중 속에는 오늘의 김우중과 같은 능력이 숨어 있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에 친구와 스승의 덕을 보았다는 김우중의 생애에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다섯 남매를 대학까지 가르친 현모(賢母)였다. 늘 성경(聖經)과 찬송(讚頌)과 기도(祈禱)로 사시던 분이다.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어머니, 찬송을 부르며 어려운 삶을 달래는 어머니, 기도를 하며 자식들의 장래를 기원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김우중은 매일 같이 아침 저녁으로 보며 자랐다. 어머니!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영향을 주신 어머니이다.

대구 방천 시장 시대의 김우중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머니는 매일 같이 신문을 팔고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그를 동생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이 돌아오면 그 때서야 저녁상을 차려놓고 온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간혹 어떤 날은 어머니만 기다리고 동생들은 자고 있었다. 어머니는 집에 돌아온 아들에게 밥상을 차려 왔다. 그런데 밥은 한 그릇뿐이었다.

"어머니, 잡수세요."

"아니다. 나는 아까 너를 기다리다가 동생과 함께 먼저 먹었다. 시장하겠다. 어서 먹어라."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늦게 집에 돌아와도 어머니와 동생들과 같이 먹던 밥상이다. 그런데 오늘은 왜 그렇지 않을가. 동생은 누어 자고 어머니는 미리 밥을 드셨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밥 그릇 하나, 그것은 그날 저녁 김우중가(家)의 단 한 그릇밖에 없는 식량의 전부였다.

"어머니가 잡수세요. 저는 집에 돌아오다가 너무 늦어서 길 거리에서 풀빵을 좀 사먹고 왔어요. 저는 배가 고프지 않아요. 드세요, 어머니! 어서 드세요."

아들과 어머니는 밥 한 그릇을 놓고 이렇게 서로 먹으라고 눈물겨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나오는 풀빵이란 무엇인가. 풀빵이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밀가루를 풀처럼 멀겋게 풀고 단맛을 내기 위하여 지금은 발암(發癌) 물질로 알려진 사카린을 약간 넣어 달게 구어낸 빵을 말한다. 풀빵이 발전하여 국화빵이 되었고, 국화빵이 발전하여 오늘의 '붕어빵'이 되었다.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만 위대하고 아름다운 성모가 아니다. 자식을 생각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성모이고 마리아이고 모성애(母性愛)의 극치(極致)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여인들이다. 그 아름다운 여인들과 착한 자식들 사이에는 오늘 이 밤도 '아름다운 거짓말'이 오고 간다. 누가 아름다운 이 거짓말을 하지 말라 할 것이며, 누가 이 아름다운 거짓말을 나쁘다 할 것인가.

이런 눈물겨운 거짓말의 한 때를 겪지 못한 사람은 이 눈물겨운 아름다운 거짓말의 세계를 모를 것이다. 사랑의 거짓말, 아름다운 거짓말, 그것이 김우중의 가슴에 맺혀 비즈니스 세상의 문을 열게 하였다. 남들처럼 배불리 먹고 편히 사는 유복한 가정의 아들이었다면 구테어 돈을 벌겠다고 사업계에 뛰어들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춥고 배고팠다는 말을 빼고 김우정은 청소년 시절을 회상할 수 없다. 배고픔과 굶주린, 그것은 김우중을 성공으로 이끈 또 하나의 어머니요 스승이요 벗이다. 그래서 그는 돈이 보이는 세상을 찾아 나섰고, 이제는 가는 곳마다 돈이 보이는 세계적인 '돈 도사'가 되었다.


3. 은행과 사람들 







대학을 졸업하고 김우중이 들어간 곳이 한성실업이다. 무역부에 들어가 은행 관계 업무를 맡았다. 그 때만해도 우리나라의 무역은 시초 단계나 다름이없었고, 무역 회사와 은행 업무 역시 능률적이거나 세련된 단계가 아니었다. 어쩌면 무역회사 직원들이 은행 주위를 허둥대고 돌아 다니는 허둥지둥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였다.

김우중의 선임자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서류를 들고 황급히 은행에 뛰어 다니고 있었다. 김우중이 업무를 인계 맡고 보니 그럴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 몇 번 씩 은행을 뛰어 다녀도 은행에서 결재는 오전에 한 번과 오후에 한 번밖에 나지 않았다. 결재 시간 직전까지 오전 오후를 나누어 서류를 하루에 두 번만 접수하면 되는 것을 선임자는 덮어놓고 은행에 서류를 빨리 접수해야 빨리 결재가 나는 줄 알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은행에 뛰어 다니고 있었다.

김우중은 은행 결재 시간을 알아낸 다음에 하루에 딱 두 번씩만 은행에 갔다. 결과는 허둥지둥 여러번 뛰어 다닐 때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은행에 가지고 다니는 서류를 요식화(要式化)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무역 서류라는 것은 거의가 고정난이고 금액이나 수량 같은 몇 가지만 유동난이다. 유동난만 공백으로 남겨놓고 고정난은 미리 인쇄해 놓음으로 해서 서류 작성에 드는 시간은 몇 분의 1로 줄고 말았다.

은행에 가는 회수가 줄고 은행에 제출하는 서류를 만드는 시간이 줄어 들었으니, 그만큼 여유가 생기고 능률이 올랐다. 바로 그것이었다. 남의 회사에 다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내 회사에 내가 다니고 있다는 생각 아래 어떻게 하면 보다 능률적이고 보다 효률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느냐를 생각해야 했다.

은행 창구는 새파란 아가씨들이 앉아 있었다. 많은 회사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으니, 창구에 앉아 있는 아가씨가 도와주느냐 않느냐에 따라 은행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달랐다. 김우중은 어떻게 하면 은행 아가씨들과 가까워 질 수가 있을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마침 회사의 창고에는 수입은 해 놓았으나 팔리지 않은 여자 양장 옷감이 많이 쌓여 있었다. 옷감은 옷을 해 입을 때에 빛이 나지, 옷을 해 입지 않고 창고 속에 처박아 둔다면 아무 가치가 없다. 김우중은 그 점에 착안하여 그 옷감들을 그 은행 여직원들에게 세일하면 어떨가 하는 생각이 났다. 은행 여직원들은 좋은 물건을 싸게 사서 좋고, 회사로서는 골치 아픈 재고품을 현금화 할 수 있어서 좋으며, 김우중 자신은 그를 계기로 은행 여직원, 특히 수출입 창구에서 근무하는 여직원들과 사귈 기회가 있어서 좋을 듯 했다.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은행 아가씨들은 좋아라고 옷감을 사가고, 회사에는 현찰이 듬뿍 들어오고, 김우중은 갑자기 은행 여직원들의 얼굴을 쉽게 익힐 수 있었다. 그 다음부터 김우중이 다니는 은행에 한성실업의 김우중이 급행(急行)을 탄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세상 만사 생각 나름이고 하기 나름이었다. 남들은 어렵다고 하지만 김우중이 보기에는 방법만 약간 고치거나 시각만 약간 조정하면 어려운 일들이 금새 쉬운 일로 변하였다. 그것이 세상이었다.

김우중은 직접 무역회사를 설립하기로 작정했다. 간신히 자본금 500만원을 만들어 직원 다섯명과 함께 대우를 창업했다. 1967년이었다. 1967년이라면 삼성의 이병철과 현대의 정주영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재벌급의 기업을 일구고 있을 때다. 그 때 고고(孤苦)의 고통스런 기업의 세계에 첫발을 밟은 대우(大宇)가 문자 그대로 지금과 같이 세계적으로 큰 회사가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아마도 창업자인 김우중 자신도 모랐을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 큰 기업을 일군 사업가치고 자신이 세계적인 기업을 일굴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사람마다 사업을 하려고 하지만 사업 자금이 없어서 사업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김우중은 돈 줄은 자신의 가산(家山)이 아니라 은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큰 기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집 재산 가지고는 큰 사업을 하기는 어렵다. 모든 기업들이 은행 돈을 가지고 장사를 한다.

그러나 어디 은행 금고가 자기 집 안방에 있는 금고처럼 마음대로 열고 닫고 쓸 수 있는가. 은행 돈을 쓰려면 쓰고 달고 신 가지 각색의 어려움을 다 당해야 한다. 대우를 창업한 초기의 김우중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번은 은행 돈이 필요했다. 규모가 좀 커서 직원들이 성사 시키기는 어려운 액수였다. 김우중 자신이 뛰어들었다. 직원으로부터 은행 관계 사정을 들은 김우중은 어둠이 깔린 신새벽에 지점장 집을 찾아갔다. 만나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사업을 한다는 사람이 어려움이 있다고 필요한 자금은 융자 받지 못하고 은행 지점장까지 만나지 못한다면 사업은 애시 당초부터 실패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김우중은 만나주지 않는 지점장 집을 몇 번이고 찾아갔다. 누가 왔다 갔다는 흔적이라도 남겨야, 그가 왜 왔다 갔는지는 지점장이 은행에 출근하면 금방 알게 된다. 결국 이러한 끈질긴 김우중의 노력은 지점장을 만날 수 있었고, 그가 필요한 자금을 얻어 쓸 수 있었다.

대우를 창업할 당시에 우리나라 기업들은 수출을 하면 망한다는 소리가 돌고 있었다. 그만큼 수출이 수지(收支) 타산(打算)이 맞지 않았다. 그래도 김우중은 수출을 주종으로 삼았다. 세계를 상대로 하는 수출을 하지 않는한 좁은 나라에서 물건을 만들고 팔아 보아야 우물 안의 개구리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밑질 각오로 세계를 상대하다 보면 거기에 국내보다 엄청나게 큰 세계 시장이 발견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김우중의 생각은 적중(適中)했다. 서서히 수출업계에 '무서운 아이'로 등장한 김우중은 어느 날 '우뚝선 대우'로 만인 앞에 나타났다. 그 날은 서울 역 앞에 서 있던 당시 한국 최고층 빌딩이던 교통부 소유 '교통센타'를 인수하여 '대우센타'라는 간판으로 갈아달던 날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그 이면사(裏面史)는 다음에 이야기 하자.

사실 그 당시에 서울에는 교통센타 말고도 또 다른 상징적인 건물이 있었다. 서울의 명산인 남산의 동쪽 끝 언덕의 넓은 땅에 순 한식으로 아담하게 지어진 영빈관(迎賓館)이었다. 5.16 후 박정희 정부는 그 위에 반공센타라는 빌딩을 세웠다가 민간인에게 불하하여 지금은 타워호텔이 되었고, 밑에 지은 영빈관은 삼성에게 불하하여 지금은 신라호텔이 되었다. 대우가 먹은 교통센타는 삼성의 이병철이나 현대의 정주영도 먹지 못하던 건물이다.

이제는 누구도 신생 대우 김우중을 넘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우와 김우중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돈과 권력이 대우의 후견인과 같았다. 돈이 없어 사업을 하지 못하고 빽이 없어서 성장을 하지 못하는 한국 특유 기업 풍토에서 대우는 돈과 권력이라는 양날개를 한꺼번에 단 비행기나 다름이 없었다. 창공(蒼空)이 저희 것이요, 세계가 저희 것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 한국에서 손꼽히는 재벌들은 벌써 2세 체제가 아니면 3세 체제 시대에 접어들었다. 삼성은 창업자 이병철이 세상을 떠나 그 뒤를 이어 2세인 이건희가 오래 전부터 이끌고 있으며, 현대 역시 창업자 정주영이 연노(年老)하여 뒤를 이어 2세들인 아들들이 이끌고 있고, LG는 벌써 구인회 구자경 구본무에 이르는 3대에 걸쳐 경영되고 있다.

이런 점에 비하여 대우는 아직도 창창한 창업자 김우중의 시대이고, 창업 1세가 다른 재벌들과 어깨를 견주며 선두 다툼을 하고 있다. 창업 30 년을 맞는 김우중의 재계 질주가 얼마나 빠른 속도를 냈는가를 감히 짐작하게 한다. 그러면 그 저력은 어데서 나온 것인가.



4. 세계는 하나다. 







'독일은 하나다'라는 말이 세계 매스콤의 헤드 라인을 장식한 때가 있었다. 이 말이 통일을 염원하던 독일인들의 구호였다.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나라도 '겨례는 하나다'라는 구호가 도처에서 밀려 온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세계는 하나다'라는 구호는 정치 구호가 아니라 대우 그룹 창업자 김우중을 설명하기 위하여 갑자기 지어낸 '캐치 플레이즈'이다.

남의 말을 하기는 쉽다. 특히 남을 높혀 주기는 어려워도 남을 깍아 내리기는 쉽다. 못사는 사람들도 잘 사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본받으려고 하기보다 깔아 뭉개는 태도를 갖기가 쉽다.

이병철이 삼성물산을 세워 무역을 하고 제일제당을 세우고 제일모직을 세워 돈을 벌자 삼성과 제일과 이병철을 존경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사람은 생산업을 하지 않고 순전히 소비재만 취급하여 돈 번 사람!'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건설적인 산업은 하지 않고 소비적인 산업만 조장했다는 비하(卑下)였다.

소비와 생산은 동전(銅錢)의 양면(兩面)이다. 소비가 있으면 생산이 있고, 생산이 중요하면 소비도 중요하다. 수출입 역시 마찬가지이다. 수출이 있으면 수입이 있고, 수입이 중요하면 수출 또한 중요하다. 보는 사람들의 판단 기준에 따라 생산과 소비, 그리고 수입과 수출의 중요성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이론적으로는 소비보다는 생산이, 수입보다는 수출이 높은 점수는 따는 것은 사실이다.

이병철에게 쏟아진 비난과 비슷한 비난이 김우중의 머리에 쏟아진 일이 있다. 김우중, 그 사람은 '자기가 세운 공장은 없고 남들이 세워 놓은 공장을 인수해서 돈을 번 사람'이라는 비아냥이다. 사실 김우중의 대우그룹이 거느리고 있는 많은 회사들을 보면 그런 지적을 받을만한 여지가 많다. 대우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많은 기업들이 대우의 창업자 김우중이 창설한 기업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창업하여 운영하던 기업들이다. 어찌어찌하여 김우중의 손에 들어와 대우와 같은 세계적인 큰 기업의 주춧돌이 되거나 일부가 되었다.

김우중도 그를 부인하지 않는다. 국내외 예를 하나씩 들어본다면 벨기에의 유니버설과 국내의 대우중詷업을 꼽는다.

벨기에에 엔트워프라는 도시가 있다. 그곳에 세계적인 기업이 하나 있었다. 경영 상태가 좋지 않아 세계 굴지(屈指)의 회사들에게 인수 교섭을 벌였다. 미국 독일 일본 기업들은 그 회사를 인수하면 망한다고 쳐다 보지 않았다.

김우중이 그 소리를 듣고 현장을 조사하도록 했다. 조사 결과 설비는 괜찮으나 노조(勞組)와 영업이 문제라고 했다. 김우중은 노조와 영업이 왜 문제가 되는가를 파악하고, 그 대처 방안은 없는가를 강구해 보았다. 있었다. 김우중의 눈에는 그 회사를 인수하여 살리고 보다 큰 회사로 발전 시킬 길이 보였다.

두 말 할 것 없이 일부 반대와 비관적인 진언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인수해서 정상화에 전력을 투구했다. 이름도 유니버설이라고 개칭했다. 얼마 가지 않아 회사는 정상화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옛날 사장이 김우중을 찾아와 팔 때의 다섯 배를 주겠으니 회사를 되팔라는 제의를 해왔다.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이 일로 김우중은 '불실 기업을 정상화 하는 세계적인 명수(名手)'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남이 세웠건 내가 세웠건 회사를 살리고 정상화하고 건실하게 키우면 되지 누가 그 회사를 세웠느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김우중의 생각이다. 아무리 큰 돈을 들여 큰 회사를세웠어도 경영이 잘못되어 망하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 큰 회사를 세우는 능력은 있으나 제대로 운영하지 못해 망하게 하는 사람이나, 큰 회사를 세우지는 못했을 망정, 쓰러져 가는 기업을 인수하여 일으켜 세우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비교하면 역시 동전의 양면과 다름이 없다.

대우중공업에 관해서도 김우중의 생각과 변명은 동일하다. 대우중공업의 전신(前身)은 다 아는 바와 같이 한국기계였다. 정부는 삼성과 현대에 한국기계의 인수를 요청했다. 그러나 삼성과 현대는 한국기계에 대한 구미(口味)가 당기지 않았다. 그러자 김우중에게 연락이 왔다. 조옷습니다! 김우중은 일거에 한국기계를 인수하여 오늘의 대우중공업이라는 큰 회로 둔갑시켜 놓았다.

국내외를 걸쳐 대우 그룹 김우중의 이런 일화(逸話)의 행진(行進)은 계속된다. 누가 그에게 회사는 세우지 않고 세워 놓은 회사만 인수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비하할 것인가. 최근에는 국내에서 허둥대고 있는 쌍용자동차를 인수하여 김우중은 대우-쌍용이라는 거대한 자동차 시장의 중앙에 서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김우중은 '쓰러지는 기업을 일으켜 세우는' 병든 기업의 세계적인 명의(名醫)이다. 의사는 환자 곁에 가야 한다. 그래야 환자를 진단하고 수술하고 투약하고 재생하게 한다.

환자와 떨어져 있는한 아무리 신통력을 가지고 있는 명의라도 죽어가는 환자를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 김우중 역시 그렇다. 김우중은 쓰러져 가는 기업을 인수하면 즉시 환자를 찾아가는 의사처럼 현장에 나타나 진단하고 처방하고 일으켜 세운다. 이른바 김우중의 현장주의(現場主義)이다.

세계적인 조선(造船) 업소로 성장한 대우조선을 재생 시킬 때도 그랬다. 김우중은 옥포 현장에 무려 1년 8개월이나 있으면서 진두 지위했다. 지엠과 헤어진후 휘청거리는 대우자동차를 보고 그는 부평 공장으로 뛰어갔다. 폴란드나 인도네시아에 자동차 공장을 세우면서는 몸을 폴란드와 인도네시아로 이동했다.

그룹의 총수(總帥)는 높고 그윽한 한 자리에 앉아 조감적인 입장에서 밑에 있는 여러 기업들을 종합적으로 내려다 보며 지휘 통솔해야 한다는 고전적(古典的)인 기업 진두 지휘론은 교통과 통신이 극도로 발달하면서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오늘의 세계는 김우중이 세계 어느 좌표에 있건 대우의 모든 정보는 김우중이 있는 지점으로 전파를 타고 날아온다. 세계는 이미 하나이다. 세계는 이미 일일(一日) 생활권이 아니라 동시(同時) 생활권이다.

김우중의 사전(辭典)에는 집이라던지 일터라던지 서재라던지 식당이라던지 하는 부동사(不動詞)가 없다. 잠은 꼭 잠 자리에서 자야하는 것이 아니다. 달리는 자동차 속에서도, 나는 비행기 속에서도 눈을 감으면 잠을 잔다. 이불이건 요건 벼개가 따로 없다. 의자 한 구석에 팔 벼개를 비면 그곳이 단잠을 자는 곳이다. 먹는 것 역시 김치 깍두기 따지지 않고 외국에가면 햄버거나 빵 한 쪽이면 그만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해외 현장 나들이에는 별난 손님들을 대동할 때가 간간히 발견된다. 그룹 총수가 해외에 간다면 비서나 유관 회사의 사장이 수행하는 것이 통상적일 것이지만, 김우중의 곁에는 때로는 학자가, 때로는 기자가 동행한다. 학자는 김우중 자신이 필요한 지식을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이라도 이용하여 습득하기 위함이고, 기자는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을 처리할 '지상(地上)에서의'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비행기 내 공중 인터뷰를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비행기가 목적지의 지상에 내리면 그는 다시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에게 세계가 하나인 지는 이미 벌써 오래 되었다. 지금의 김우중은 세계가 하나인 시대가 아니라 이렇게 '하늘과 땅이 하나'인 시대를 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김우중의 삶이고, 대우가 가는 길이다. 21세기 전야인 2000년의 문턱에서 그와 함께 현재 하늘과 땅과 세계를 달리고 있는 대우 가족은 약 30 만명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바로 기적(奇蹟)도 아니고 신화(神話)도 아닌 인간 김우중의 이야기이다.



좌초 위기를 맞은 김우중의 소리

필자/송우, 사초집필실 대표 




노태우 시대에 놀랄만한 일이 많지만, 그 중에서 나는 처조카인 박철언과 노태우의 관계에 대하여 많은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한다. 노태우가 별을 달고 있을 때에 노태우 집안에는 솔직히 이야기해서 노태우를 빼고 나면 이렇다할 사람이 없었으나, 처가 쪽으로는 쟁쟁한 인물들이 있었다.

그 중의 대표자가 노태우의 처남인 김복동이다. 김복동은 노태우와 사관학교 동기 동창생이며, 그 인연으로 김복동의 여동생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김복동은 잘 알려진 대로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생이고, 자기의 동기 동창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한 패거리가 되어 12.12 사태를 일으키고, 5.17을 일으켜 정권을 잡는데 대하여 심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던 장군이다. 그렇다고 김복동이 적극적으로 자기의 친구인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고 팔 걷어 부치고 말린 흔적도 없다.

김복동을 빼고 나면 처조카로 박철언이 있었다. 그 때 박은 서울지검의 새파란 검사로 있었고, 집은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전노 쿠데타가 성공한 후에 전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희한한 군정(軍政) 조직을 만들어 대권(大權)을 잡았고, 이어서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까지 점령하였다. 군인 치고 전두환처럼 단기간에 합법(合法)을 가장(假裝)하여 대통령이 된 자(者)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전두환은 권력(權力)을 잡는데 특출(特出)했다.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 앉자, 노태우는 수도방위사령관을 거쳐 전두환이 앉아 있던 보안사령관 자리에 앉았다. 그 때에 노태우는 전두환에게 자기 처조카인 박이 똑똑하다며 청와대에 데려다 쓰기를 권했고, 그 결과 박철언은 국보위(國保委)를 거쳐 청와대 정무비서실(政務秘書室)에 들어가 대통령(大統領) 법률(法律) 담당(擔當) 비서(秘書)가 되었다.

대통령 법률 담당 비서란 어떠한 임무를 가지고 어떠한 일을 하는 자리이며 사람인가. 일반적으로 대통령 법률 담당 비서란 대통령이 챙겨야 할 법률 문제를 보좌하는 자리이고 사람이다. 그러나 대통령 법률 담당 비서에 대한 이러한 관찰은 너무 나이브한 해석이다. 겉으로는 그러한 임무를 띄고 있지만 실제로는 소위 통치(統治) 법률(法律)이라는 것을 다루는 자리이다.

그렇다면 통치 법률이란 무엇인가? 이 또한 어의(語義)를 해석할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일을 거론해야 이해가 쉽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대통령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거나 대통령의 통치 행위에 걸림돌 역할을 하는 자가 있을 경우, 이러한 자는 이러 이러한 법 몇 조 몇 항에 있는 이러 이러한 법률 조항으로 묶어 이러 이러하게 처리하면 찍! 소리 못하는 쥐약 먹은 쥐새끼가 됩니다, 하고 진언(進言)하는 자리이며, 만일 그러한 법이 없다면 이러 이러한 법을 이러 이러하게 만들어 그 법으로 다스리면 그 놈의 목은 단칼에 날아갑니다, 라고 꾀를 내어 주는 사람이다.

그러한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던 자리였으니, 박철언은 소위 쓰리 허라고 통칭되던 허화평 허삼수 허문도의 위세(威勢)에 눌려 전두환 시대에는 외부적(外部的)으로 표면화(表面化)된 권력을 행사하는 자로 세인(世人) 앞에 노출되지는 않았으나,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 일약(一躍) 황태자(皇太子)라는 별명(別名)을 얻을 정도로 서슬이 시퍼런 권력을 휘두르고, 돈과 여인을 떡고물 주무르듯 하였다는 것이 정치(政治) 이면(裏面)을 아는 사람들이 흘리는 말이다. 흘러나온 말들 중에는 정치인에 관한 루머가 다 그런 것처럼 확인할 수 없는 것도 있고, 확인된 것 중에 법의 저촉을 받는 일부 사항에 대하여서는 이미 검찰과 법원의 판단이 나서 박철언 자신이 형무소에 들어가 몸으로 때우고 나왔다.

그러나 내가 거론하고자 하는 박철언의 전두환과 노태우, 두 대통령에 대한 통치 보좌 행위 중에 가장 큰 것은 두 대통령을 보좌하던 새파란 박철언이 어느 사이에 황태자가 되어 '차기(次期) 대권(大權)'을 노렸다는 박철언의 야심(野心)과 야망(野望)이다. 박철언은 주인을 잡아먹는 호랑이 새끼가 되어 소위 월계수회라는 대단위 거국적인 청년 조직을 이끌고, 이 조직을 대리 관리하던 나창주라는 사람의 입을 통하여 '박철언은 떠오르는 태양(太陽)'이라고 떠벌리게 하였고, 노태우의 마누라 김옥숙 여사에게 달라붙어 노태우를 귀찮게 했다.

"여보오. 박철언 이를 후계자(後繼者)로 지명(指名)합시다. 세상에 박철언 이보다 똑똑한 자가 어디에 있고, 정권을 잡은 후에 박철언 이보다 더 당신을 보살펴 줄 사람이 어데 있습니까? 김영삼 이를 후계자로 삼았다가는 큰 일 나요!"

이게 김옥숙의 말이었다. 김영삼 이를 후계자로 삼으면 큰일난다는 김옥숙의 말을 결과적으로 옳았다. 노태우는 김영삼을 후계자로 대통령을 시켰다가 자기 자신이 감방을 가는 수모를 당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박철언 이는 대통령 시키자는 김옥숙의 말은 좁은 치미폭을 두르고 사는 여자의 눈으로는 어떨지 모르나, 일국의 역사(歷史)라는 안목에서 보면 전적으로 옳지 않다. 어떻게 하여 그 새파란 검사 출신 새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만든단 말인가. 그것도 경상도 사람에다가 자기 조카를 말이다.

박철언은 황태자로 노태우 권력의 핵심에 있을 때에 소위 'GP(Grand Plan)'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政局)을 타개(打開)하기 위하여 김대중과 노태우, 다시 말하여 전라도 세력과 경상도 세력이 합하여 정치를 하자는 것이었고, 남북 분단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북한의 김일성을 만나 통일의 물꼬를 트자는 것이었다. 물론 박철언이 주장하던 이 두 그랜드 플랜은 둘 다 실패로 돌아갔다.

내가 김우중의 대우 그룹이 좌초(坐礁) 또는 공중(空中) 분해(分解) 직전(直前)에 처한 이 시점에서 구테어 박철언을 들고 나온 이유가 있다. 박철언이 노태우 정권에서 나를 놀라게 한 것처럼 김우중은 박정희시대에 나를 놀라게 했다. 한성실업이라는 조그마한 회사의 직원으로 있던 김우중이라는 청년(靑年)이 난데없이 나타나 서울역 앞에 지어 놓았던, 당시로는 대한민국 최대(最大) 최고층(最高層) 빌딩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대우센타라는 그 빌딩은 서울역 앞 양동의 사창가(私娼街) 일대를 허물고 21 세기 대한민국의 교통을 집약(集約)하여 총괄(總括)하는 빌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부가 지은 건물이다. 이 건물을 박정희는 과거 김우중 청년의 아버지와의 인연을 잊지 못하고 그 은덕(恩德)을 갚기 위하여 김우중에게 불하(拂下)하여 주었고, 제일은행(第一銀行)은 김우중 청년을 팍!팍! 밀어주도록 하였다.

한 때 우리 나라의 큰 건물은 다 그 꼴이었다. 일본 놈이 망하고 달아나자 소위 적산(敵産)이라는 일본인 소유의 토지(土地)와 건물(建物), 그리고 시설(施設)이 모두 약삭빠른 자의 손으로 들어갔고, 박정희시대에도 이 못된 버릇은 없어지지 않아, 정부 어떤 특정 목적을 위하여 지었던 건물이나 땅은 또 다른 먹성 좋은 사람들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서울의 남산은 세종대왕의 입산 금지 조치이래 누구도 넘보지 못하던 민족(民族)의 성산(聖山)이었으나, 박정희가 반공센타라는 지었다가 개인에게 불하해 주어 지금은 타워호텔이 되었고, 국빈(國賓)을 모실 집으로 지었던 남산 동쪽 자락의 영빈관(迎賓館)은 지어서 삼성그룹의 이병철에게 주어 지금은 신라호텔이 되었다.

김우중의 대우그룹은 박정희가 살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박정희가 죽은 후에도 전두환 노태우 시대까지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을 놀라게 하였다. 항상 재계(財界) 순위 5위 이내(以內), 아니 2-3위 내에서 한국 경제의 톱 리더 자리를 점유했다. 이는 삼성이나 현대, 그리고 LG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한국 경제의 신화(神話)였다.

전혀 다른 신화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성과 현대, 그리고 LG는 모두 창업자(創業者) 스스로 만들어 키운 회사이다. 그러나 대우는 창업자(創業者)인 김우중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세원 회사라기 보다, 남들이 세워 놓았던 회사를 인수(引受)하여 '뭉쳐서' 만든 대기업 집단(集團)이다. 돈을 번 사람들 중에 자기가 기업을 세워서 돈을 번 사람과 남들이 만들어 놓은 사업체를 인수하여 돈을 버는 사업으로 성공한 자중에 남의 회사를 인수하여 돈을 번 사람 사이에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자기가 회사를 세우는 사람은 '세움의 어려움'을 알지만, 남의 회사를 인수하는 사람은 세움의 어려움보다 '재건(再建)의 기쁨'을 안다. 따라서 회사를 세우고 돈을 번 사람은 그 세움의 어려움이 너무나 쓰디썼기 때문에 돈을 쓸려고 하여도 써서 쓰기가 어렵지만, 재건의 기쁨으로 번 돈은 너무나 달아 싸도 써도 끝이 없다.

나는 김우중에게 그런 면이 있었다고 본다. 김우중은 한국에서 재건(再建) 기업(企業) 집단(集團)으로 대우 그룹을 형성한 후에, 그 맛에 끌려 그런 걸음을 멈추지 않고 '세계는 넓고 할 일도 많다'며 세계로 나갔다. 세계 도처에서 쓰러지고 있는 쓸만한 기업들을 골라 인수하며, 한국에서 하던 식으로 재건의 기쁨을 맛보려 했다. 그 결과 겉으로 보면 세계의 유수(有數)한 기업들이 대우의 손에 잡힌 것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빚이 얼음덩이처럼 팽창(膨脹)하여 종국(終局)에는 자기 배가 터질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은 대우호가 좌초(坐礁)한 상태이다. 침수(浸水)가 될 것인지, 아니면 다시 부양(浮揚)할 것인지, 다시 부양하였다가 공중 분해가 될 것인지, 아니면 부양 후 부력(浮力)을 유지하여 21 세기의 바다를 다시 항해(航海)할 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시기이다. 다만 필자의 개인적인 희망으로는 부침(浮沈)보다는 부양(浮揚)을, 부양(浮揚)보다는 항해(航海)의 재개(再開)를 열망(熱望)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김우중의 대우그룹은 언제부터 부침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와중(渦中)에서 김우중은 어떤 말을 토로(吐露)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피땀 흘려 모았던 외환(外換)을 다 까먹고 대한민국 김영삼 정부가 IMF에 구제(救濟) 요청을 한 것은 1997년 11월이다. 그 때로부터 한 달도 못되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 당선자가 되었고, 1998년 3월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이 된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民主) 투사(鬪士)로 대통령이 된 것을 일소(一掃)하고 한 순간에 IMF 사태(事態) 해결사(解決士)로 등장했다.

그 때 대우호(大宇號) 선주(先主) 겸 선장(船長)인 김우중은 김대중(金大中) 정부(政府)가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고 있는 구조(構造) 조정(調整) 해고(解雇) 등 일련의 IMF 처방전(處方錢)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어쩌면 이와는 정반대(正反對)라고 할 수 있는 전혀 다른 GP(Global Picture)의 전도사(傳道師)로 새정부에 얼굴을 내밀었다. 박철언의 GP와는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대한민국 기업이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땅에서만 터전을 잡는 시기는 이미 지났고, 대한민국 기업인이 대한민국 내에서만 경영을 하는 시대도 이미 지났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기업을 세우고 대한민국에서 성공한 기업인이지만, 이제는 세계를 무대로, 세계에서 터전을 잡고, 세계에서 이윤(利潤)을 창출하는 세계 경영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정치 격변(激變)이란 기업의 사활(死活)을 좌우하는 중대한 사안이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설 때도 그랬다. 대통령 선거전에서 김영삼과 한판 승부를 겨루던 현대그룹의 정주영을 향하여 김영삼은 가는 곳마다 정주영을 향하여 '돈을 정권을 얻으려는 것은 총칼로 정권을 얻는 쿠데타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주장했고, 김영삼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겁(?)도 없이 돈만 있다고 자기에게 대들어 자기 표를 깎아 먹은 정주영 할아비에게 모진 매를 가했다. 금융(金融)을 제한하고 특혜(特惠)를 몰수하고, 자금을 회수했다. 그 결과 정주영으로서는 김영삼 정권 5년이 지나간 반세기보다 더 긴 세월이었다.

김영삼 정권 후에 들어선 김대중 정권은 어떤 면에서는 한국 정치에 혁명적인 사건이다. 김대중은 그 동안 역대 정권으로부터 용공주의자(容共主義者) 혁신주의자(革新主義者) 진보주의자(進步主義者)로 지목(指目) 지탄(指彈) 받아왔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당연히 옛 정권(政權)들의 물주(物主)였던 재벌(財閥) 재계(財界) 인사들이 사태의 추이(推移)를 세심하고 관찰하고 있었다. 그 때에 김우중은 김대중 정부가 매달리고 있는 IMF 처방전을 휴지(休紙) 조각처럼 생각하고, 또 이런 말을 했다.

"축소(縮小)가 능사(能事)가 아니다. 고난(苦難)의 시기를 맞은 우리는 축소보다는 오히려 수출(輸出)을 500만 달러로 확대(擴大)해야 한다. 그 길이 살길이다."

이는 재벌(財閥) 기업(企業) 구조 조정 정책(政策)에 대한 정면(正面) 도전장(挑戰狀)과 같은 폭탄(爆彈) 선언(宣言)이었다. 한 마디로 IMF 처방전과 새 정부의 정책을 틀려먹었다는 거나 다름이 없는 언사(言事)였다. 그 이유를 김우중은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서구적(西歐的) 방식과 동양적(東洋的) 방식은 다르다. IMF는 서구적 방식이다. 산업 혁명이래 가지 각종의 단계를 거쳐 오늘에 이른 서방 세계, 특히 미국을 비롯한 IMF가 자기들 방식대로 따라 오라고 하는 것은 틀려먹은 생각이다. 일본과 중국은 미국(美國)이나 IMF의 권고(勸告)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여 미국은 중국이나 일본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는 아시아적 방법이 있다. 아시아적 방법이 아무리 나쁘다고 하더라도 80%는 옳고 20% 정도가 나쁠 것이다. 그런데 그 80%를 나쁘고 나머지 20%만 옳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전문화(專門化)하라고 하는데, 전문화한 기업 치고 살아 남은 대기업이 없다. 대기업은 절대로 유지해야 한다. 대기업이 무너지면 21 세기의 한국 경제는 전망(展望)이 없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요즘의 한국 사태를 봐라. 한국이 망한다고 난리 법석이 아닌가? 그 현상의 흐름을 살펴보아야 한다. 외국 컨설팅 회사들은 자꾸 한국 기업의 상태가 나쁘다는 소문만 내고 있다. 그 다음에는 CNN이 와서 한국 경제를 조지고, 그 다음에는 무디스가 와서 신용(信用) 등급(等級)을 깎아 내리고, 돈을 주면서 고금리(高金利)를 강요한다. 기업은 장사를 해 보아야 1% 이윤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데 국내 은행마저 4%의 고금리를 먹는 고리대금업자(高利貸金業者)가 되었다. 왜 기업이 이렇게 앉아서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가."

이 말 속에는 무슨 뜻이 숨겨 있을까. 대한민국 김대중 정부는 미국이나 IMF가 하라는 대로 졸졸 따라만 가고 있다는 말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김대중 정부로서는 김우중의 놀라운 변신적(變身的) 발언(發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혹시 괘씸한 생각을 한 사람도 있지는 않았을까? 이런 의구심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김우중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만 미친놈이 되었다. 내가 500 억 달러의 수출 확대 정책을 펴야 된다고 찾아다니며 설명하다가 당한 수모(受侮)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러면서 김우중은 한 술 더 떠 1,000억 달러 수출론을 들고 나왔다. 그렇다면 김우중은 왜 새정부의 경제 정책과 상치(相馳)되는 이런 발언들을 하였으며, 자기가 보아도 빤히 알 한국 경제의 외환(外換) 고갈(枯渴) 사태에도 끄덕하지 않고, 자신 만만하게 이런 말을 하며 국내외(國內外)를 주름잡고 있었을까, 그의 말을 들어보자. 

"김대중 대통령도 알고 계신 일이다. 우리는 GM을 믿었다. GM과 합의를 하지 않았던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 후 미국에 갔을 때에 GM측에서도 대와의 합의 사항을 말씀드렸다. 그 때에 대우가 GM에서 합의 약정대로 75만 달러를 들여왔으면, 대우(大宇)에게 대우(大愚)와 대우(大憂)는 없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GM은 자체 분규에 휩싸였고, 포드와의 전쟁에서 지지 않기 위하여 대우와 합의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김우중은 또 한 말이 있다. 

"쌍용자동차 있지 않느냐? 그거? 정부에서 인수하라고 해서 인수했다. 우리 대우자동차와 중복 투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쌍용의 인수가 대우에게 아무런 지장도 초래하지 않았다." 

김우중의 말은 계속된다. 

"삼성자동차도 있지 않느냐? 그걸 왜 대우가 인수하려고 했겠느냐? 그것도 돈 잘 벌고 있는 대우전자와 빅딜을 하면서까지 말이다.... 어디 그것뿐이냐? 기아자동차도 1차 유찰(流札)이 되면 구조 조정 대상에 넣어 주기로 되어 있었다. 정부가 2차로 입찰하는 바람에 우리만 병신이 되었다. 왜 그러나! 장사꾼은 신용을 지킨다. 그런데 왜 정부가 이러나.

우리와 협상하기로 되어 있던 것이 아니냐? 만일 대우가 정리 대상이 되는 불실 기업이었다면 쌍용 삼성 기아 세 자동차를 대우에게 주려고 했겠느냐?" 

쌍용자동차와 삼성자동차, 그리고 기아자동차가 대우 행(行)으로 방향타(方向舵)를 잡았었던 점을 보면, 이 대목에서 정부의 IMF 타개 정책은 중간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정부가 대우를 잘못 보았던 실수가 있었던 것을 정부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김우중은 새정부가 들어서서 격변(激變)하는 정책(政策)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존(生存)과 발전(發展)이라는 두 가지 열쇠를 가지고 국내와 국외를 치달았다. 그 때 김우중 신상에 중대한 사태가 발생했다. 병원에 입원하여 머리 수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수술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지만, 그 때에 나는 김우중 회장이 얼마나 고민을 했으면 머릿속의 실핏줄이 터졌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苦悶)한다는 말도 있고, 머리가 터질 정도로 싸운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김우중은 머리가 터졌던 것이다.

부자(富者)가 되는 것이 좋은 줄 알지만 부자라는 말에 팔팔 뛰고 돌아다니며 해명한 회사가 대우이다. 왜 그랬을까? 정부에서 재계(財界) 순위(順位)를 발표했다. 그 때까지 한국의 재계 순위는 현대-삼성-대우-LG-SK 순(順)이었다. 그런데 대우가 쌍용을 가져가면서 재계 순위가 현대-대우-삼성으로 되어, 재계 순위 3위이던 대우는 일약 삼성을 누르고(?) 2위에 올랐다. 말하자면 재계 순위로 보면 삼성보다 더 앞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발표에는 대우가 길길이 뛰어다니지 않을 수 없는 요소가 들어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란 부채(負債)도 자본(資本)으로 환산하는 철칙이 있다. 정부가 발표한 재계 순위 제2위의 대우는 부채를 포함한 부자(富者)였다. 부채를 빼고 나면 당장 부르던 배가 푸욱! 꺼져 굶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재무(財務) 제표(諸表)와 재무 구조가 공개되었다, 대우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 때에 일본의 노무라증권에서 대우의 사세(社勢)에 관한 '대우(大宇)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결정적인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대우그룹은 빈 껍데기이다. 대우는 빚이 많다. 빚을 갚기 위하여 돈을 끌어내야 할 금융은 제한 받고 있다. 대우는 주식 시장에서 자금을 끌어오던지, 아니면 재산을 파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식 시장에서 대우는 자금줄이 끊겼다. 주식 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 전망도 없다. 그렇다면 대우가 계열 회사를 팔아야 하는데, 국제 시장에서 대우의 계열 회사 중에 팔릴만한 회사가 어디 있느냐?" 

대우로서는 엎친 데 겹친 격이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서울대와 고려대, 그리고 한국외국어대 등에서 김우중의 '세계경영론'을 교재(敎材)로 삼았고, 하버드대학의 비즈니스 스쿨에서도 김우중의 성공 스토리를 세계 경영의 성공 사례로 가르치던 장본인이 김우중이고, 그가 창업한 세계 굴지(屈指)의 대기업이 대우였다. 그런데 그 대우가 사면초가(四面楚歌)에 걸렸다. 이 때에 김우중은 굽히지 않았다. 새 정부의 재벌 해체 정책에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자신의 자금력도 대내외적으로 과시했다.

"재벌 해체론은 잘못된 일이다. 한국 경제를 누가 여기까지 끌고 왔느냐? 재벌 아니냐! 재벌이라고 하지 말라. 차라리 대기업이라고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 대기업이 나쁘다고 단죄(斷罪)하는 것은 단견(短見)이다.

일본을 봐라.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미국은 100만 이상씩 고용하고 있던 재벌그룹을 강제로 해체시켰다. 그러나 일본은 어떻게 하였는가? 다시 재벌이 일어나도록 하였고, 그 결과 오늘의 일본은 세계 경제 대국(大國)이 되었다. 왜 우리 나라는 재벌을 죄악시(罪惡視)하고 구조 조정에 해체 위기를 맞아야 하는가.

대우의 기업은 세계 도처에 있다. 자동차 회사도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 세계 도처에 있다. 대우는 지금도 유럽에서는 리보 기준 이하로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대우가 일본의 도요다처럼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대우자동차도 세계 탑 5 가 될 수 있다.

지금은 해외 기업들이 인수 단계라서 어렵기는 하지만, 해외 기업이라는 것이 인수하면 곧장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2-3년은 적자가 나고, 그 후 2-3년 동안에 정상(正常) 가동이 되고, 그 후 2-3년에 돈을 벌게 된다. 내가 세계에 펼쳐 놓은 그랜드 픽쳐는 적어도 8년은 되어야 돈을 번다. 우리는 그 와중에서 좌초의 위험에 걸린 것이다.

대기업을 왜 해체하려고 하는가. 대기업이 가지고 있는 시설(施設)은 해체하면 고철(古鐵) 덩어리가 되고 만다. 돌려야 황금 알을 낳는다. 그런데 왜 해체를 한단 말인가."

이 쯤되면 김우중의 시각(視覺)이 새정부 경제 정책과 대단히 마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쿼테이션은 김우중의 발언 내용을 김우중 입장에서 강화(强化)하여 쓰는 크리에이티브 다이알록이기 때문에 뉘앙스에서는 차이가 있을 것이나, 김우중의 말과 마음을 읽는 데에는 크게 참고가 될 말들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김우중은 대리인(代理人)을 시켜 손을 들고 말았다. 계열 기업을 정리하겠다는 말이었다. 김우중으로서는 백기(白旗) 투항(投降)이었다. 그래도 대우에게 조여오는 사면(四面)의 압박(壓迫)은 풀어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었다. 김우중은 스스로 단상(斷想)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34 개 계열 회사를 8 개로 정리하고, 자동차 산업에만 전념(專念)하겠다." 

이건 물론 공개(公開) 발언(發言)이다. 백기를 든 후에 적장(敵將) 앞에 가서 무릎을 끓고 앉아 읍소(泣訴)하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 처절한 대우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렇다면 대우 그룹의 창업자인 김우중 자신은 개인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하였다. 여기에 대한 김우중의 답변은 이렇다. 

"견디는 것이다. 갈 데까지 가더라도 끝까지 견디는 것이다. 나는 지금 물에 빠졌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끝까지 견딜 것이다.

마음을 비운 지 오래다. 우리 집안은 사업가 집안도 아니고 돈이 많던 집안이 아니다. 나는 운(運)이 좋았다. 내게 오는 운은 오는 족족 잡아 내 것으로 만들다 보니 이렇게 커진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 집안에 사업가가 나와서는 안 된다. 큰놈은 대우재단을 키워 미국의 록펠러 재단과 같이 만들고, 작은놈은 박사 학위를 한 다음에 아주대학을 키어 교육에 전념했으면 하는 것이 내 자식들에 대한 희망이다.

두고 봐라. 우리는 그렇게 될 것이다." 

김우중의 그랜트 픽쳐! 이제 붓을 놓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잠시 쉬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세월이 흘러야 나올 것 같다. 다만 한국 경제를 이끌고 온 재계(財界) 2-3위 자리를 다투던 대우호(大宇號)와 창업자(創業者)가 원기(元氣)를 회복(回復)하는 날이 오는가를 세계 경제인들과 함께 한국 국민들은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