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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Info)

인물탐구-정주영회장.. 다들 알죠?

1. 소양강 








"강물을 막아 댐을 건설해야겠다."

대통령 박정희의 생각이었다. 한강의 한 지류인 북한강의 소양강 한 자락을 막아 댐을 건설하는 것을 놓고 세계적인 댐 건설 회사들은 물론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막아야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미 세계적인 공사가 있다는 정보를 들은 일본 건설회사는 관련 장관들과 로비가 끝내고, 곧 계약과 함게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이 큰 공사에 별희한한 대안(代案)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콘크리트가 아니라 모래와 흙으로 막하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주영이었다. 정주영이 제시한 공법은 이미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전략적인 위치에 댐을 건설할 때는 별 이의없이 채택되는 공법이었다. 대통령 박정희가 현대건설 사장 정주영을 불러 그 이유를 물었다.

"폭탄이 떨어지면 콘크리트 댐은 박살이난다. 그러나 모래와 진흙으로 건설한 사력댐은 폭탄이 떨어져도 자리에 웅덩이만 생길뿐이 댐이 터지지 않는다."

포병 출신의 박정희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소양댐은 결국 정주영의 아이디어대로 사력댐으로 건설하기로 결정이 났다. 관계 장관과 일본 회사의 코가 납작해졌다. 이 때 정주영은 박정희를 처음 만났다. 소양강 댐공사가 사력댐 공사로 결론이 나자 지난 날 압록강에 수풍댐을 건설한 일본인 노엔지니어는 소양강은 강바닥에 암반이 약하여 콘크리크댐을 건설할 수 없다는 고견으로 정주영의 해박한 혜안에 동의했다.

정주영은 토목공학과를 나온 사람도 아니고 발전학을 연구한 사람도 아니다. 무(無) 전공이 그의 전공이었고, 글방 공부에 보통학교 다닌 것이 공부의 전부이니, 요즘 같은 고학력 시대에 보면 무학(無學)이 그의 학력이었다.

아버지는 6남1녀의 장남이었고, 정주영은 6남2녀의 장남이었다.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지금은 북에 있다. 서당 3년에 소학 대학 자치통감 5언시 7언시를 익히고, 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배울 것이 없어 맨 날 놀고도 성적은 2등을 하는 걸물(傑物)이었다. 열 한 살에 몹시 기침을 해서 학교를 중단한 일이 있었다. 그 때는 왜 그렇게 기침이 나오는지 약 한 톨 먹지 못하고 끙끙대다가 나았는데, 후에 알고 보니 폐병을 앓은 흔적이 폐에 남아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열 네 살에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본인은 공부를 더 해서 학교 선생을 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있었으나,장남의 장남으로 태어난 주영을 아버지는 농사꾼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래야 아래에 있는 여섯 동생들을 키우고 성가(成家)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주영의 생각은 달랐다. 나이가 들수록 고삐를 매지 않은 '인간 황소'가 되어, 농사도 잘 지었지만, 틈만 나면 고향 땅을 박차고 나가려고 이리 굼실 저리 굼실, 굼실거리고 있었다.

신문을 보니, 청진에 제철공장이 생겨 노동자를 구한다는 기사가 있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3년 선배를 꼬셔 가출(家出)을 감행했다. 첫 번째 가출이었다. 우선 원산으로 갔다. 통천에서 원산은 200리, 도중에 임절미 하나에 시래기 국 한 사발 얻어 먹고 간신히 원산에 왔다. 원산과 청진 사이에 시메트 공사판이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어 흙이 가득찬 트럭을 레일 위에 놓고 미는 작업장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작업장에 손님이 왔대서 나가 보았더니, 뜻밖에 아버지였다. 실패한 가출이었다. 대대로 이어온 농토를 지켜야 한다는 아버지를 따라 다시 집에 갔다.

궁둥이가 근질거려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친구 둘을 꼬셔 다시 서울행 가출을 감행했다. 도중에 한 친구의 친척 집에 들어갔다가, 그 친구의 형님이 길목을 지키고 있어서 그 친구는 잡혀 가고, 다른 친구와 정주영은 서울행을 강행한다. 도중에 신사 한 사람을 만났다. 금강산의 한 호텔로 취직하여 가는 요리사라는 말을 듣고, 그를 따라 금강산에 갔다가 집에서 몰래 훔쳐온 노자(路資) 돈 마져 다 날렸다. 세상 도처에 멀쩡한 사기꾼이 있다는 사실을 그 때에 알았다.

금강산 장안사에서 김화 쪽으로 길을 재촉했다. 중간에 친척집에 있어서 들렸다가 이번에는 아버지가 쳐놓은 덫에 걸려 다시 고향으로 잡혀갔다. 두 번째 가출도 실패였다.

또 신문을 보니 평양과 경성의 부기학원에서 6개월 코스의 경리학원생을 모집하며, 졸업하면 취직이 보장된다는 광고가 있었다. 그 때 마침 아버지는 소를 팔아 괴짝 속에 숨겨 놓고 계셨다. 소판 돈을 훔쳐 다시 야반(夜半) 도주(逃走)서울행을 재촉했다. 세 번째 도망이었다. 참으로 지독한 놈이었다.

강원도 통천 산골 촌놈이 새벽에 청량리에 내렸다. 서울은 참으로 컸다. 경리학원을 찾아가 입학했다. 두 달 쯤 되었을 때였다. 또 아버지가 나타났다. 참으로 지독한 아버지였다. 찾는 자와 도망 가는 자,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그 아들에 그 아버지였다. 서울 가서 성공한 놈이 없다는 아버지의 눈물어린 설득에 그만 헉!하고 울음을 터뜨린 정주영은 다시 고향으로 간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있다던가, 정주영은 죽어도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또 했다. 멀리 지인을 통하여 약간의 돈을 빌어 친구와 함께 네 번째 가출 길에 올랐다. 청진에 가도 들키고 서울에 가도 들키니, 이번만은 다른 꾀를 냈다. 친구는 서울에 있도록 하고 주영은 인천으로 가서 숨어 부두 노역 생활을 했다. 서울에 올라와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공사장에 가서 날품을 파는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오리엔트제과의 전신인 풍전엿공장에 취직하여 1 년 여 있었다. 돈은 한 푼도 모으지 못하고 맨날 그 타령이었다.

지나는 길에 복흥상회(復興商會)라는 쌀집에 취직되었다. 먹고 자고 한 달에 쌀 반 가마의 월급을 주었다. 하는 일은 배달이었다. 집 주인 아들은 부잣집 아들이라 난봉꾼이 되어 돈만 쓰지, 장사에 관심이 없었다. 아들한테 실망한 주인이 아침 저녁으로 가게 앞을 썰고 물까지 뿌려 놓는 근면하고 성실한 청년 정주영에게 쌀가게를 주었다. 하늘의 도우심이었다. 입사 4년만의 일이었다. 경일상회(京一商會)로 이름을 바꾸어 도매상을 차렸다. 그의 나이 스물 두 살이었다.

7년만에 고향에 찾아가 아버지에게 논을 사드리고 장가도 들었다. 서울에 와서 아현동에 자동차 수리 공장을 차렸으나 뜻하지 않은 화재로 남의 차까지 몽땅 불에 태어 날거지가 되었다. 공장은 신설동으로 옮겨 3년만에 꽤 돈을 벌었다. 해방 직전에 관의 강제 합병 조치로 공장에서 손을 떼고 고향에서 해방을 맞았다.

서울로 올라와 1946년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세웠다. 자동차 수리업은 토건업에 비하여 수입이 그리 많지 않아 1947년에 공업사 간판 옆에 '현대토건사'라는 간판을 하나를 더 달았다. 왠지 '현대'라는 말이 자꾸만 마음에 들었다. 말의 뜻이 진취적이라 더욱 좋았다. 이렇게 해서 21세기 전야에 지구촌을 웅거(雄據)하는 현대자동차와 현대건설이 태동했다.

6.25 전쟁이 터졌다. 대구를 거쳐 부산에 가서 정훈장교를 만나 7천톤 동력선의 민간(民間) 선무대(宣撫隊)가 되어 '괴뢰군은 망한다. 곧 유엔군이 들어온다'는 방송을 하며 남해안 일대를 누볐다. 그 때 동생 인영이 미군 부대 통역이 되었고, 그 인연으로 삽시간에 10만 여 명이 잘 수 있는 임시 막사 공사를 부산에서 하게 된다. 그 뒤에 미군 부대 일이라면 정주영의 것이요 현대건설의 것이었다. 양키들이 정주영과 현대인들을 보면 '현다이 넘버 원'을 외첬다.

정주영과 현대건설이 유명해진 것은 1957년의 한강 인도교 공사 때문이었다. 당시 1천환으로 공사에 응찰했던 모 회사는 공사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본다는 장관의 말에 따라 2위로 응찰했던 현대에 공사를 주었다. 그 동안 건설 공사를 하다가 적자도 많이 보았으나 이 공사로 상당히 사세(社勢)와 명성(名聲)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정주영, 그리고 현대건설의 건설 공사 사업은 계속된다. 4.19가 나고, 5.16이 터졌다. 젊은 군인들이 새로운 각오로 새로운 국토 건설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건설회사로 보면 일감이 많아진 셈이다. 아니 많아질 정도가 아니라 폭주할 정도였고, 어떤 것은 공사가 너무 커서 국내 건설 업자들이나 현대 건설이 먹지 못할 정도였다. 소양강 댐 공사도 바로 그런 공사 중의 하나였다. 


2. 고속도로 





오늘의 세계를 '하나의 세계'라 하고, 이 하나의 세계를 가능하게한 가장 큰 원인이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지구의 이쪽과 저쪽, 그리고 오지와 문명의 세계는 별개의 세계인양 서로 고립한채 떨어져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지상(地上)의 오지(奧地)와 문화(文化)의 벽을 헐었고, 거리와 시간과 공간의 개념마져 한꺼번에 바꾸어 놓았다. 교통의 발달이라는 면으로 보면 세계는 '1일 생활권의 하나의 세계, 하나의 지구촌'이 되었고, 통신이라는 이름으로 보면 이미 '1일 생활권'이 아닌 '동시(同時) 생활권(生活圈)'이 되었다.

고속도로는 지상(地上)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電波) 고속(高速) 도로(道路)가 우주 공간에 무수히 깔려 제한 없이 지구촌 어데서든지 쌍방 통신 왕래가 가능해진 전파정보고속도로시대이다. 앞으로 교통과 통신이 얼마나 어떻게 더 발달하여 인류 생활에 어떤 변화를 줄지에 대해서 정확히 예측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발전의 속도가 빠르다.

우리나라나 세계가 이러한 세상이 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바로 얼마전의 일이다. 현란하게 발달 벌전해 나가고 있는 정보 통신은 그만두고라도, 우리나라의 도처에 건설되었거나 건설되고 있는 지상의 고속도로에 대한 역사를 되돌아보자.

1960년대 초의 일이다. 정치적 낭만주의자로 알려진 김종필이 국내 정치의 소용둘이 속에서 밀려나 잠시 외유 중에 독일에 갔다. 그림 잘 그리고, 피아노 잘 치고, 드럼까지 처대는 김종필의 젊은 시대는 폭주족(暴走族)이었다. 포장 도로가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시속 60킬로미터로도 달리지 못하던 시대에 독일의 아우토반에서 그는 시속 200킬로미터 전후의 속도로 폭주를 즐겼다.

"각하! 우리나라에도 고속도로를 뚫어야 합니다."

요즘 대통령들은 임기 5년 동안에 한 해가 멀다고 정상 회담을 빙자하여 세계 여행을 다니고 있지만, 나라를 세운 후에 12년간 통치권을 쥐고 달러를 아끼던 이승만이나 18년간 권좌에 앉아 있던 박정희는 그리 심한 외국 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그런 박정희가 독일에 가서 보니 역시 독일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은 김종필의 말 그대로였고, 우선 서울과 부산을 고속도로로 뚫으면 경부간의 산업 발전과 문화 발달에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현대 정주영을 불러라!"

박정희와 정주영의 독대(獨對)였다. 일찍이 해외 건설에 눈을 돌렸던 현대는 그 무렵 태국에서 국제 경쟁 입찰로 고속도로 공사를 한 바 있었다. 수지는 ꁹ추지 못한 공사였으나, 고속도로 건설 경험의 축적이라는 뼈아픈 지적(知的) 재산(財産)을 모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그런 경험을 가진 건설회사가 없었고, 보통 사람들은 고속도로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마져 정립되어 있지 않을 때이며, 고속도로 건설이라면 으레히 선진 우수 건설회사들이나 하는 난공사로 알고 있었다.

정주영은 신이 났다. 태국에서 겪은 쓰라린 '실패의 경험'이 이번에는 우리의 힘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성공의 어머니'가 되었다. 공사는 착착 진행되었다. 국책 제1 사업이라 정부의 지원과 격려 또한 대단했다. 불철주야(不撤晝夜) 공사장에 정주영이 있었다. 찝차 속에서 잠시 잠간씩 잠을 자는 습관이 이때에 생겻다. 하늘에는 가끔 대통령 박정희가 타고 공사 진행 현장을 돌아보는 헬리콥터가 뜨고 있었다.

세계적인 건설회사들은 한국이 자신의 힘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니까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어지간해서는 당시에 해낼 수 없는 공사가 바로 고속도로 공사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독기(毒氣)와 정주영의 오기(傲氣)가 이러한 우려를 말끔히 뎶어냈다. 공사는 예정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막바지에 큰 문제가 발생했다. 소양강 댐 공사에서도 그랬지만 정주영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경석(硬石)보다 모래나 진흙 같은 절암(節岩) 토사(土砂)와 인연이 많은 모양이다. 소백산이 가로 놓여 있는 옥천과 영동의 당재터널을 팔 때의 일이다. 터널을 파들어 가자 경석이 아니라 절암토사였다.

터널 공사에서 경석이 아닌 절암토사를 만나다는 것은 날벼락이나 다름이 없다. 파기만 하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수없이 장비들이 망가지고, 공사 현장에서 생명을 잃는 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무서워서 공사 현장에 접근조차 못할 지경이었다. 하루 10 미터의 터널을 파고 들어가기는 커녕 겨우 30센치미터를 파지도 못해서 날이 저무는 때가 허다했다. 성질이 불같은 정주영이 보아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큰 일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건설부 장관이 일주일에 한번씩 현장에 왔다. 도로국장은 3일이 멀다고 현장에 왔다. 정주영은 하루도 현장을 떠날 수가 없었다. 대통령 박정희의 추상같이 호된 질책이 매일 같이 장관과 정주영의 면전에 쏟아졌다. 체구(體軀)가 작은 박정희의 어데서 그런 무서운 담력과 가공할 추진력이 나오는지 장관이나 정주영으로서도 고개를 설레설레 내졌지 않을 수 없었다. 정주영이 달리는 말이었다면, 박정희는 뛰는 말에 박차(拍車)를 가하는 기수(騎手)였다. 그래도 경석이 아닌 절암 토사의 터널 공사는 쉽게 진행되지 못했다.

"생각 좀 해 보자. 무슨 묘책(妙策)이 없을가?"

현대건설은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보통 시멘트보다 20배나 빨리 굳는 시멘트를 생산하여 굴을 파자마자 그 자리에 시멘트를 이겨 발라 붙이는 기상천외(奇想天外)의 공법을 채택했다.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6개월이 되어도 뚫릴 가능성이 없다던 당재터널은 드디어 3개월만에 성공적으로 뚫렸다.

단군 이래 최초 공사인 경부고속도로는 이렇게 해서 드디어 착공 290일만에 개통되었다. 박정희와 정주영과 현대와 한국민의 쾌재!였다. 멀다던 부산과 서울을 하룻만에 오고가는 시대가 개막되었다. 구름도 쉬어 간다는 추풍령도 단숨에 넘을 수 있게 되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자 서울과 부산, 그리고 그 주변 도시들은 모두 1일 생활권으로 편입되었다.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기술로 건설한 고속도로라고 하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7개 건설 회사가 참여했으나 이익을 낸 회사는 현대를 비롯한 몇몇개에 불과했고, 몇 개의 회사는 도산(倒産)의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그만큼 단가(單價)가 적었다. 공사 기간은 엄청나게 단축되었다. 착공 1년도 되지 않아 준공 테이프를 끊고 달려본 고속도로이다.

그 때 쯤 와우아파트가 사건이 터졌다. 서울 연희동 언덕에 세워졌던 와우 아파트가 무너져 숱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 때 쯤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결이었다. 말 잘하기로 이름난 김대중 후보가 경부고속도로를 놓고 그대로 지날 사람이 아니었다.

"경부고속도로가 누어 있으니 말이지, 서 있었다면 와우아파트처럼 와르르! 무너졌을 것이다."

입 힘 좋은 김대중 후보의 독설(毒舌)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경부고속도로는 도처에 불실 공사의 흔적이 나타나, 그 후 현재와 같은 누더기고속도로가 되었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지만 건설 30 여 년이 되는 경부고속도로는 건설 비용의 몇 배에 해당하는 보수 공사 비용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성공은 했으나 졸속(拙速)이 남긴 문제였다.

문제없는 성공은 없다. 특히 건설공사에서 그렇다. 경부고속도로가 아무리 문제를 잉태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여력(餘力)과 저력(底力)은 한국의 교통과 도로 사정을 바꾸어 놓았다. 호남고속도로가 뚫려 광주와 전라도가 서울과 1일 생활권이 되었고, 영동고속도로가 뚫려 강릉과 강원도가 서울과 1일 생활권이 되었다. 뿐만이 아니다. 서해고속도로와 동해고속도로, 그리고 중앙고속도로가 뚫리는 세상이다.

서울과 평양, 그리고 부산과 신의주를 잇는 남북고속도로가 뚫릴 날도 머지 않았다. 한국에 고속도로의 건설 신화를 창조한 정주영은 아마도 하늘에서 '영혼(靈魂)의 질주(疾走)'를 통하여 이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한반도의 고속도로는 최초에 누구의 손에 의하여 이 땅에 건설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고, 그 때가 되면 박정희와 정주영의 이야기가 또 다시 남북한에서 동시에 신화(神話)처럼 떠오를 것이다. 


3. 바닷가 







국력(國力)은 체력(體力)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체력이 아닌 능력(能力)은 어데에서 나오는 것일가. 그에 대한 해답은 정주영으로부터 찾아야 할 것이고, 정주영으로부터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정주영과 바닷가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1915년에 정주영이 태어난 지구상의 좌표이다. 송전리에는 송전해수욕장이라는 유명한 바닷가가 있고, 거기에서 10리 쯤 가면 정주영의 고향이 있다. 고향을 떠나 최초의 노역(勞役)을 한 곳도 인천 바닷가 부두(埠頭)였고, 부산에서 돈을 번 곳도 부산 바닷가였다. 뿐만 아니다. 죽을 뻔 했던 곳도 바닷가였고, 여생을 트럭터를 몰려 농사꾼으로 지내고 싶다고 대단위 간척 사업을 벌린 곳도 서산 천수만 일대의 바닷가이다.

어두 컴컴한 신새벽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정주영은 습관대로 차를 몰아 울산 현대조선소 공사장을 향하여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맨 날 같은 시간에 다니던 길이다. 그런데 그날 따라 이변이 생겼다. 악셀레이터를 밟자 차는 한 바퀴 빙 돌더니 허공을 날아 첨벙! 물 속에 떨어져 잠기기 시작했다. 허공에 떴을 때에 정주영은 '아하! 사람은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희미한 기억이 있었고, 물에 떨어지자마자 '어떻게든 살아나야 한다'는 생각이 났다.

차는 점정 더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차 문을 열려고 하였으나 수압(水壓)에 의하여 열리지 않았다. 정주영의 팔힘 발힘 등힘은 알아줄 힘이다. 그러나 발을 동동 구르고 팔을 휘휘 저어도 물 속에 갈아앉고 있는 차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차 속에 물이 가득 들었다. 이는 차 내부와 외부의 수압이 같아 짐을 의미한다.

정주영은 창문에 등을 대로 온 등힘을 다하여 밀어냈다. 꽝! 드디어 문이 열렸다. 급히 헤엄을 쳐서 물 위로 떠올라 왔으나 그 짧은 순간이 자신이 살아온 일생보다 더 길고 더 어려웠다.

풍랑(風浪)이 심했다. 그가 떠오른 곳은 부두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또 죽을 힘을 다하여 파도를 이기며 간신히 부두에 접근했다. 두 팔로 부두 난간을 잡고 날 살려라! 소리칠 사이도 없이 기진맥진한 몸을 부축이며 매달려 있었다.

"누구야!"

"누구긴 뭘 누구야 이놈아, 어서 밧줄을 가져와라!"

"아이구 회장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그리고 밧줄은 어데에 있습니까?"

기가 막힐 일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보고 밧줄이 어데 있느냐고 물어보는 경비원이었다. 그날 잠못했으면 정주영은 수중(水中) 고혼(孤魂)이 될뻔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용왕(龍王)님의 도움이었다.

"조금 나은 것이 없을가..."

이것이 사업가 정주영의 화두(話頭)이다. 자동차 수리 공장을 하다가도 좀 나은 것이 없을가 하는 생각 끝에 현대토건을 만들었고, 현대건설이라는 굴지(屈指)의 건설회사로 키운 다음에도 너 나은 것이 없을가 하다가 땅을 파는 건설업보다 쇠붙이를 용접해 만드는 조선 공업이 나을듯하여 조선 공업에 손을 댔다. 건설 사업에서 얻은 노 하우와 기술들을 이용하면 조선(造船) 공업이야말로 어찌보면 누어서 떡먹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울산에 조선소를 만들다가 육상(陸上)에 있는 현대(現代)라는 대궐(大闕)을 버리고 수중(水中) 궁궐(宮闕)로 들어갈뻔한 사건이다.

봉이 김선달은 대동강 물을 팔아 먹었다더니 사업가 정주영은 허허 벌판 사진 한 장 가지고 세계 굴지의 조선소와 겨루어 수주(受注) 활동을 벌였다. 영국에서의 일이다. 한국의 정주영이 배를 만든다니 아무도 귀를 기우려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굴지의 조선사업가를 찾아갔다.

"이 돈을 보시오. 대영제국이라는 당신들은 1800년대에 조선 사업을 시작했지만 우리 한국인은 그보다 300년이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이 돈에 새겨 있는 것과 같은 철갑선을 만든 세계적인 조선국(造船國)이었소."

이 말 한 마디로 대형 선박 조선 기술이라는 엄청난 노하우를 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또 다른 굴지의 해운 선박 회사를 찾아갔다.

"배를 우리 회사에서 만드시오"

"아니, 당신 회사에 배 만드는 공장이 도대체 어디에 있오?"

"여기요!"

정주영은 바닷가 허허 벌판 25만 평 사진 한을 제시했다. 주문만 해 주면 이곳에 조선소를 완성하여 배를 짓어 주겠다는 배짱이었다. 배짱도 이쯤되면 배포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뱃장이고, 그 뱃장은 신념(信念)에서 나온다. 다시 말하여 정주영이 어려움을 돌파하고 나갈 수 있는 능력(能力)은 바로 이 엄청난 신념(信念)에서 나온다.

이런 뱃장 하나로 드디어 26만톤 급의 배를 건조(建造)했다. 길이 270미터에 높이 27미터의 거대한 건조물이었다. 정주영은 정말 이 배가 물 위에 뜰지, 아니면 가라앉을지, 의구심이 가득했다. 스르르르 배가 도크에서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엄청난 긴장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스르르르르, 드디어 배가 가라앉지 않고 물 위에 떴다! 찝차를 타고 물 속에 빠졌다가도 떠오르는 재주를 가진 정주영이니, 명색이 배인되, 그 배를 물 속에 가라앉히지 않고 떠오르게 하는 것은 긴장은 되었으나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었다. 현대가 조선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의 신호탄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송전바닷가를 바라보면 소년 정주영이 세계적인 조선소를 성공적으로 발동을 걸었다.

정주영은 다시 눈을 사우디로 돌렸다. 거기에 세계적인 주베일 항구 건설 공사가 있었다. 입찰에서 낙찰했다. 그러나 후에 정주영의 고백에 의하면 '세계적인 공사를 따기는 했지만, 사실은 그런 공사에 대한 경험은 전무한 상태였고, 지식 또한 깜깜 절벽이었다'고 회상한다. 간이 커도 보통 큰 사람이 아니다. 경험도 없고 지식도 없으면서 그 거대한 공사에 입찰하여 낙찰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는 한 치의 실수없이 완벽한 공사를 해냈다.

그는 세계적인 사업가로 성공하였지만 본시 그는 그가 말한대로 '농부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소원은 농토(農土)였다. 남보다 넓은 농토를 갖는 것이 그의 아버지 뿐만 아니라 당시 우리나라 모든 농민들이 꿈이었다. 아버지의 그런 꿈이 대사업가로 대성을 한 후에도 그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

"저곳을 막아 농토로 만들자"

서해안 서산지구 천수만 간척 사업을 시작했다. 완공되면 여의도의 33배나 되는 엄청난 규모였다. 국내외 건설 현장에서 사용하던 장비와 인력, 그리고 기술이 천수만 바닷가에 투입되었다. 공사는 비교적 쉽게 진척되었으나 마지막 마무리 공사인 물막이 공사라는 벽에 부딪첬다.

서해안은 잘 알려진 것처럼 간만(干滿)의 차이가 많고 조류(潮流)의 유속(流速)이 대단히 빠르다. 사리 때에 보면 한강 홍수 통제 시점의 유속보다 더 빠른 바닷물이 흐른다. 드넓은 바다에 만리장성(萬里長城)같은 둑을 쌓았으나 마지막 270미터의 물막이 공사가 문제였다. 백약(百藥)이 무효(無效)였다. 수 십톤 짜리 돌을 산덤이처럼 부어도 돌은 물 속에서 급류에 휘말려 모래처럼 빨려나갔다.

"무슨 수가 없을가?"

정주영은 또 '수 타령'을 불렀다. 그 때 번쩍이는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앙드레 지드는 '좁은문'이라는 불후(不朽)의 명작(名作)을 써서 세계적인 문호(文豪)가 되었지만, 정주영은 '좁은문'이 아니라 '좁은구멍' 땜질이라는 아이디어로 세계적인 건설 회사의 사장이 된 사람이다.

앞에서 말한 경부고속도록 터널 공사가 그랬다. 그 좁은 구멍을 뚫기 위하여 근 속성 시멘트를 개발했다. 이번에도 세계가 발칵 뒤짚힐 정도로 놀란 정주영의 '좁은구멍'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그는 350 여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고철 선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선박을 끌어다 270 여 미터의 물막이 마무리 공사장에 투입했다. 아이디어는 대성공이었다. 지도를 변경한 대역사는 이렇게 하여 마무리 지었다. 세계적인 물막이 공사 토픽과 함께 정주영은 자신이 말한대로 여생을 트럭터 운전하면서 보낼 수 있는 거대한 농토를 만들었다.

바닷가와 얽힌 정주영의 성공 스토리는 한이 없이 많다. 이곳은 정주영의 생애를 다섯 토막으로 나누어 간단하게 쓰는 곳이고, 그 세 번째 테마가 '바닷가'이다. 네 번째 터마는 '권력'이고, 다서번째 테마는 '분신(分身)'이다. 세ꓦ째 이야기 '바닷가' 이쯤에서 끝내자. 다만 서산 농장을 완성한 후에 그가 말한대로 트럭터를 몰고 여생을 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4. 권력 






재벌(財閥)에 대한 기초 지식이나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재벌들은 재벌 상호 간에 패권(覇權) 다툼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없고, 정경(政經) 유착(癒着)의 실상(實像)을 모르면서 권력(權力)과 재력(財力)의 유착과 싸움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그 내막(內幕)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해가 뜨는 것을 보면 날이 밝아 낮이 되고, 해가 지면 밤이 온다는 정도의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정주영과 권력의 이야기를 펼쳐볼가 한다.

이승만과 정주영의 관계는 밝혀진 것이 없다. 박정희와 정주영의 관계는 앞에서 몇 번 언급한 일이 있다. 그렇다면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김영삼과 정주영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박정희시대에 정주영은 포항제철의 박태준과 약간 껄꺼러운 관계가 있었고, 삼성의 이병철과도 돈독(敦篤)한 관계였다고는 평가되지 않는다. 삼성과 현대 사이에는 서로 할 말들이 있을 것이고, 박태준과의 관계는 정주영이 아직 풀지 못하고 있는 숙원 사업의 하나인 제철(製鐵) 산업에 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다. 박태준은 죽어도 이 땅에 포철 이외의 제철 회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사람이고, 정주영은 죽어도 철강 산업을 하고야 말겠다고 벼르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90이 넘은 이승만의 비서 출신이고, 자유당 정권의 내무부 장관 출신이며, 공화당 정권의 당의장 출신이던 고 윤치영 선생을 만난 일이 있었다. 그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권력의 총구멍에서 나오지 않은 재벌이 어디 있나!"

그의 결론을 명쾌했고, 그의 설파(說破)는 쾌도난마(快刀亂麻)였다.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그의 말 속에는 '모든 재벌은 권력을 아버지로, 권력이 낳은 아들'이라는 뉴앙스가 풍겨 있었다. 여기에서 공개할 필요은 없지만 그는 실제로 자기가 본 그러한 실례들며 이야기했다.

전두환과 정주영의 관계는 앙숙(怏宿)으로 시작된다. 전두환 패거리들이 정주영을 불렀다. 가보니 거기에 김우중에 와 있었다.

"경제 산업 구조를 통폐합할 예정이다. 자동차를 택하던지, 발전 산업을 택하던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정주영은 전두환 집단의 방침을 현장에서 거부했다. 천하의 이병철이 전두환 집단의 언론 통폐합 조치 현장에 끌려가 티비시 포기에 대한 '오케이 서명'을 해주고 올 정도로 '무서운 군인들'이었던 전두환 패거리에게 반기(反旗)를 든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정주영은 현대는 대우와는 다르다고 했다. 대우는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업, 남들이 지어 놓은 건물을 인수하여 재벌이 되었지만, 현대는 건물 하나, 기업 하나, 어느 것도 자기 손을 거쳐 만들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런 기업체를 정부의 방침이라 하여 호락호락 내줄 수 없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무서운 아이들'의 권력을 배경으로 한 협박과 공갈을 심했다. 드디어 그도 발전 사업을 포기하였고, 자동차 산업을 선택하여 창원중공업은 대우로 가고, 대우의 자동차는 현대로 오게 되었으나, 어디 그게 말대로 되던 세상인가. 정주영은 창원중공업을 잃었으나, 김우중은 자동차를 잃지 않았다. 결국 이 통폐합인지 억압인지의 결과로 현대는 중공업을 날리고 대우는 자동차를 날리지 않았다. 권력과 재벌과 파워 게임은 이렇게 놀음판을 방불한다.

전두환의 대를 이어 민선(民選) 대통령이 된 노태우와 정주영의 관계는 노태우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정부와 현대가 소송 싸움으로 번지고, 재벌이라는 사람이 새로운 정당을 급조하여 자신이 직접 대통령 후보로 나오는 사태로 발전한 것을 보면 불을 보듯 뻔하다. 노태우 퇴임을 앞두고 정주영의 '막판 대결'은 대통령 후보라는 관을 스스로 써야했다.

코오롱의 이동찬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나이드신 분이 권력과의 싸움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직접 대통령에 나왔겠느냐'는 기록을 남겼고, 자유당 시절과 공화당 시절, 그리고 전두환 시절을 통하여 5선 국회의원으로 야당의 원로로 있던 어떤 분은 '안 나가도 2천억을 빼앗기고, 나가도 2천억밖에 쓰지 않으니, 결국은 정 회장이 직접 대통령 후보로 나선 것이 아니냐'는 조심스런 판단을 했다. 이동찬의 이야기나 노정객의 이야기나 정주영은 노태우 정권과 정경유착을 한 것이 아니라 정경대결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들이다.

노태우와 정주영의 대통령 선거를 통한 불화(不和)에서 부작용(副作用)이 나타났다. 그것은 엉뚱하게 노태우 이후의 대통령으로 당선한 김영삼과 정주영의 갈등과 대립이었다. 야당이라는 같은 집안에서 정치적 거물이 된 김영삼과 김대중의 대통령 되기 최후의 결전장이나 다름이 없던 선거전에 정주영이 뛰어들자, 정주영의 표는 김영삼의 표를 주로 까먹어 상대적으로 김대중에게 유리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 때에 김영삼이 가는 곳마타 내뱉은 말이 있다.

"돈으로 권력을 사려는 것은 총칼로 쿠테타를 일으키는 것 보다 더 나쁩니다."

김영삼 연설의 특징은 짧은 말을 가는 곳마다 똑 같이 해대는 일이다. 이 때도 그랬다. 김영삼은 입만 열면 정주영과 돈과 쿠테타를 들먹였다. 정주영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단상에 올라서면 김대중보다 김영삼을 공격했다. 결국 김영삼과 정주영의 사이에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가 건설되었고, 그런 관계는 김영삼이 권력을 잡은 후에 현대그룹의 자금 압박이라는 족쇠를 채우는 감정의 씨앗이 되었다.

정주영은 자신은 정치의 덕을 보기는 커녕 정권이 바뀔 때마다 큰 곤욕(困辱)을 치루었다는 기록을 남긴 일이 있다. 아마도 그 말은 사업을 하면서 한 평생을 보낸 노인(老人)의 가슴 속에 깊히 박혀 있은 회한(悔恨)의 한 덩어리가 풀어져 나온 말인지 모른다. 재벌의 막강한 재력을 배경으로 정당을 창설하여 금뱃지를 마음대로 나누어 줄 정도의 영향을 발휘한 그이지만 그 회한만은 지울 수 없나보다.

다른 재벌들이 자식을 정치에 입문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는 달리 정주영은 아들을 국회로 보냈다. 돈 냄새와 권력 냄새가 나지 않는 유순(柔順)한 신사풍의 정몽준 의원에 대한 세평도 있다. 그의 뒤에는 항상 아버지 정주영과 아버지가 일으킨 현대그룹, 그리고 경제와 축구라는 단어들이 따라다니고, 성급한 이들은 21세기 대권(大權) 적임자론을 펼치고 있으나, 정치 조직인 정당 배경이 없는 그에게 그런 말이 합당한지 지금으로써는 판단하기 힘들다.

재벌의 규모가 커지면 권력이 쉽게 재벌을 지배하기는 어렵다. 재벌도 규모가 적을 때에 권력의 입김에 넘어간다. 정주영의 현대는 이미 한국의 기업에서 세계의 기업으로 랭킹되고 있다. 현대의 정주영이 일년에 움직이는 돈과 대한민국 정부 최고 수반인 대통령이 움직이는 돈의 규모 중에 어느 것이 더 클가. 말할 것도 없이 현대의 규모가 더 크다.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그렇다. 대한민국 정부가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현대나 삼성이나 대우가 미치는 영향이 더 어떤 면에서는 작은 단계에 접어들었는지도 모를 세상이다.

우리나라에서 정치가 경제를 지배하는 시대는 서서히 종말(終末)을 고하고 있다. 권력을 배경으로 재벌을 지배하려는 자와 초국가적인 재력을 배경으로 정치 권력의 지배를 받지 못하겠다는 경제인 사이에 벌어지는 아픔을 정주영과 현대는 다른 재벌에 앞서 먼저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재벌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지 모르나, 재벌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철부지 권력'을 여러 차례 겪은 일이 있기 때문에 이미 권력에 대한 위협은 별로 느끼지 않을만큼 성장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권력과 재력의 파워 게임은 끝나고 정권(政權)과 신권(神權)을 둘 다 거머쥐고 있던 신성불가침시대에서 정권과 신권이 분리된 것처럼 권력과 재력도 서로 분리되어 자신의 영역을 지키며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온다. 이미 선진국은 그런 단계에 접어들어 있지 않은가. 


5. 분신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면 좀 어설프기는 하지만 '꼬레아/코리아' '삼숭/삼성' '현다이/현대' 등과 같은 외국화된 한국말들을 들을 수 있고, 실제로 삼성 제품과 현대자동자들이 심심치 않게 외국 땅의 눈 앞에 발견되어, 동방의 조그마한 나라인 한국에서 태어난 소외감이 어느 사이에 우쭐감으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에게 그런 우쭐감을 선사해 주는 현대자동차의 각종 차들이 아마도 지금쯤은 상륙하지 않은 나라는 지상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때 대영제국의 상징인 유니온 잭이 휘날리는 곳에 해가 뜨지 않은 곳이 없다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을 지금은 현대자동차의 바퀴가 돌아가는 곳에 해가 뜨지 않은 곳이 없다는 말로 바꾸어 놓아야할 세상이 되었다.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조선, 현대전자.... 그 숱한 지구촌의 '현대/현다이'는 지금 천수(天壽)를 누리고 있는 한국의 기업가 노옹(老翁) 정주영의 분신(分身)들이다.

해방 후에 자동차 수리공업에 첫발을 뒤딘지 20 여 년이 되었을 때다. 그 때까지 정주영은 자동차 업계를 떠나 건설업에 열중했고, 그 동안에 우리나라에는 일본 도요타 자동차를 도입하여 '코로나'라는 차로 조립 판매하는 신진공업이 있었다. 그 때에 정주영이 주식회사현대자동차를 설립하여 미국의 포드와 손을 잡고 '코티나'를 조립하여 판매하기 시작했다. 미국 '코'쟁이들은 현대가 '코'티나를 조립하여 판매하기까지에는 약 3년이 걸릴 것으로 보았으나 정주영은 그들의 예상을 깨고 단 1년만에 차를 완성하여 팔고 있었다.

코쟁이들이 파란눈을 둘리며 놀랬다. 이어서 정주영은 미국 자동차 회사와 교섭하여 조금 더 큰 단위의 조립 생산 라인을 설치하고, 좀 더 많은 자동차를 만들어 내고 싶었다. 미국 측과 구체적인 교섭에 들어가자 코쟁이들의 콧대가 어찌나 높은지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별 바보들이 다 있군!"

정주영은 그렇게 생각하고 미국 측 파트너와 헤어지며 현대자동차 혼자 독창적인 국산 자동차를 개발한다는 뜻을 세웠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의 히틀러가 국민차를 개발한다고 결심하여 그 유명한 '방개' 또는 '반딧불' 차로 불리우는 폭스바겐을 만든 것과 같이 정주영은 그 순간에 국산 제1호로 세계를 달리는 말이된 포니를 탄생하게 했다.

정주영은 그렇게 역경(逆境)을 기회로 변화시키는 기회(機會)와 역경(逆境)의 연금술사(鍊金術師)였다. 기고만장(氣高萬丈)한 포드의 콧대를 꺾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니며 협상을 계속하고 포드의 저고리 자락이나 계속 붙잡고 다녔다면 오늘의 현다이자동차는 지상에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때에 포드를 보고 바보라며, 독자적으로 포니를 개발한 것이 오늘의 현대자동차가 있게된 배경이다.

정주영은 참으로 희한한 인물이다. 자동차 사업을 하겠다고 울산에 터를 잡았으나 하루는 불어닥친 폭풍(暴風)과 밀어닥친 해일(海溢)로 공장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을 당했다. 천재지변이란 문자 그대로 하늘의 재앙이고 땅의 변동이라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주영은 그런 천재지변 앞에서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격렬하게 아우성치며 현장을 독려했다. 그 땅이 바로 연산(年産) 1백만대를 능가하는 현대자동차를 생산해 내는 모태가 되었다. 어지간한 사람같으면 땅을 치고 통곡하며 하늘을 원망하며 시작한 사업을 포기할 성 싶으나 정주영은 그러지 않았다. 그 땅에 역경을 찬스로 만드는 또 한번의 연금술을 실현했다.

현대전자를 창립할 때도 그랬다. 남들은 다 앞서가는데 뒤늦게 시작한 현대전자가 그들과 어깨를 겨루며 세계로 진출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했다. 정주영을 받들고 모시고 조언해 주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다.

"해보기나 했어! 책임은 내가 질터이니, 해 봐!"

이 말은 정주영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멘트이다. 정주영은 자동차 사업이 잘 안될 것이라고 했을 때도 이 말을 했고, 조선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을 때도 이 말을 했으며, 사우디 주베일에서도 서찬 간척지에서도 이 말을 토해냈고, 현대전자 창설 전야(前夜)에도 이 말로 전자라는 신천지에 뛰어드는 두려움에 가득찬 그룹을 독려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우리나라에 5대 재벌이니 10대 재벌이니, 재계 20위 이내니 하는 말들이 있지만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곳이 전국경제인연합회이다. 빌딩은 여의도 한복판에 우뚝 서 있고, 스카이 라운지에는 명성이 자자한 중국집이 있다.

1960년대 초에 만들어진 전경련 초대 회장은 당시 자타(自他)가 공인(共認)하던 삼성그룹의 창업자 이병철이 경선으로 뽑혔다. 2대 회장은 경선으로 이정림이 당선되었고, 그 후 누구 누구를 거쳐 정주영이 경선으로 회장에 뽑혔다.

그런데 이 경선에 특징이 있었다. 돈이 없나, 명예가 없나, 힘이 없나, 꾀가 없나, 심뽀가 없나, 흥부 놀부가 다 있는 곳이 재계(財界)이다. 좋은 것과 궂은 것을 가릴 것 없이 없을 것이 하나도 없을 곳이 재벌들의 세상이다. 그런 재벌들의 모임에서 정주영은 만장일치(滿場一致)로 회장에 추대되었다.

확실한 이변(異變)이었다. 그러나 그 이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후 10 여 년간 정주영은 이 거대한 조직에서 연이어 다섯번이나 회장에 당선된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그 후 지금까지 깨지지 않았다.

정주영을 보고 세상에서는 별이별 말을 다하고 있지만 정주영은 재계에서도 그런 위치를 차지한 섣불리 말하기 어려운 '역설적(逆說的)인 사람'이다. 내가 그를 가르켜 역설적 인간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순리보다 역리 속에 살아난 불사조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순리(順理)만 택(擇)하고 역리(逆理)를 순리(順理)로 바꾸는 기회의 연금술적 능력이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를 주름잡는 정주영의 분신도, 세인(世人)을 놀래게 하는 정주영의 일화(逸話)와 비화(秘話)와 신화(神話)도 없다.

삼성의 이병철과 현대의 정주영을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비지니스의 후계(後繼) 구도(構圖)와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이라는 점에서 한 가지 이들의 세계를 반추(反芻)해 볼만만 일이 있다. 공통점이 있다면 이유야 서로 다르지만 장자(長子) 상속(相續) 전통(傳統) 사회(社會)인 우리나라에서 이병철과 정주영은 둘 다 장자에게 비지니스 대권(大權)을 상속해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병철은 생전에 하려고 했던 일들은 한국비료를 제외하면 거의 다했다. 그렇게 어려운 언론 분야까지 진출하여 전파 매체로는 동양방송이라는 라디오와 텔레비젼을 창업했고, 인쇄 매체로는 중앙일보를 창간했으며, 군부 통치자들에게 방송 매체를 빼앗기는 불운(不運)이 뒤따르기는 하였으나, 경영은 모두 성공적이었다. 그런 언론 분야를 진위(眞僞)야 가릴 수 없지만 최근에 후계 구도의 삼성이 포기한다는 설이 있어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병철이 당대에 손을 대지 않은 분야가 자동차 산업이다. 왜 그 재계의 귀재(鬼才)가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지 않았던가에 대한 의문은 지금까지 아무도 풀지 못하는 신비(神秘)의 세계(世界)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병철은 자동차 사업을 하려면 얼마던지 할 수 있는 재력과 능력이 있었고, 실제로 5.17 군사 정변 이후 전두환 경제 개혁 팀에서 그 설립하기 어려운 자동차 공장을 공짜(?)로 준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거절(拒絶)했다. 그렇게 똑똑한 아버지가 뛰어들지 않은 그 신비의 세계에 아들 이건희가 뛰어들어 삼성자동차를 세웠으니, 그 사업의 전개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자못 흥미로운 관찰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이병철에 비하여 정주영은 하고 싶은 사업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이다. 다른 테마에서 잠시 언급한 일이 있는 제철(製鐵) 분야이다. 그는 지금도 모든 산업의 중심은 제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철 산업에 뛰어들려 하였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마음과 태도는 삼성이나 현대나 마찬가지이다. 현대의 아들들이 이런 아버지의 뜻을 받들려고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근에 하동 어디에 현대제철을 짓는다고 발표하였다가, 아이엠에프니 정권 수평 교체니 빅딜이니 재계 구조 조정이니 하는 살벌한 세상이라 꽁무니를 빼는 세상이다. 이 또한 정주영의 후계자가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삼성의 자동차 산업과 함게 흥미로운 관찰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육체(肉體)와 정신(精神)과 영혼(靈魂)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주영, 그는 이미 인생의 석양에 산다.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80 노옹(老翁)이 건강하면 얼마나 건강할가. 그래도 정주영은 서러울 것이 없다. 살아 생전에 현대의 용트림을 가능하게 했던 정주영의그 무서운 정신은 정주영의 분신인 수많은 현대의 개체 개체마다에서 살아 숨쉬고 있고, 세상을 떠나도 정주영의 영혼은 현대와 함께 지구촌 도처에서 얼과 넋으로 남아 보다 나은 '인류의 앞날'을 위한 등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