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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Info)

인물탐구-삼성과 CJ를 만든 사람 [이병철]

1. 청년 거부 원점 회귀 입지전 







이병철, 그는 확실히 부자 집의 아들었다. 1910년 경상남도 선령의 1,000 석 꾼 이찬우와 안동 권 씨 사이에 태어난 4남매의 막내둥이이다. 그 시대에 1 천 석을 할 수 있는 집은 조선 땅에 그리 많지 않았다. 부자라 해야 100 석을 하는 사람이 한 면에 한 둘 있을 정도였고, 대개는 지주와 소작인 관계를 유지하며 농업에 종사했고, 소작인들 중에는 대대로 지주 집에서 일하고 먹고 사는 종살이로 일생을 보내는 경우도 흔했다.

할아버지는 거유(巨儒)였고, 아버지는 시골에서 큰 농사를 지으면서도 한양 땅을 오고가며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에 관여할 정도로 활동적이었고, 선구적이었다. 그 때에 이병철의 아버지는 한양땅에서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 이승만을 만나 서로 교류한다.

다섯 살에 할아버지가 세운 서당에 들어가 천자문을 배운다. 남들은 두 세 달이면 뗀다는 천자문을 그는 1년 동안 배웠다. 진도가 좀 늦기는 하였으나 5년 간의 한문 수학은 논어(論語)까지 통독(通讀)하게 했다.

열 한 살에 진주에 있는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고, 곧 바로 외가가 있는 서울 가회동으로 와서 수송보통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 때에 속성과가 있는 중동중학교에 전학한다. 속성과란 보통학교를 속성으로 졸업하고 중학교 과정을 시작하는 당시 학제(학(學制)였다.

서울에 와서 이병철이 가장 어려움을 겪은 일은 친구들과 언어 소통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경상도 말과 서울 말이 그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 서울 아이들끼리 하는 말을 알아 들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가 하는 경상도 말씨를 서울 아이들이 알아 듣지 못해 상당 기간 무척 애를 먹었다. 교통과 통신이 두절되었던 당시의 조선 땅은 그런 땅이었다.

혼담이 성사되었으니 모년 모월 모시에 내려오라는 아버지의 편지가 왔다. 그 때의 결혼은 거의가 그랬다. 부모가 배필(配匹)을 정해 주면 그것을 천생연분(天生緣分)으로 알고 평생을 백년해로(百年偕老)하는 부부가 되었다. 중학교 3학년인 열 아홉 살 때의 일이었다. 이 때에 달성 박 씨 처녀와 결혼하여 이 세상에 4남5녀를 둔다.

중학교 4학년 때에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동경으로 유학갈 생각을 한다. 현해탄은 멀고도 험한 바다였다. 멀미가 났다. 1등 칸에 탄 사람들이 보였다. 그는 1등 칸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 서! 여기가 어데라고 조선놈이 오는가? 돈도 없는 조선놈이 건방지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돈은 얼마던지 있었다. 분했다. 나라없는 슬픔이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나라가 없으면 돈이 있어도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서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젊은 이병철의 뼈 속까지 파고 들었다.

와세다대학 정경과(政經科)에 들어갔다. 공부가 무엇인지 그 진미(珍味)를 알고, 한 동안 책벌레가 되었다. 2학년 때다. 이상하게 몸이 아팠다. 휴학을 했다. 그래도 몸은 회복되지 않았다. 이국 땅 객지에서 더 이상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귀국하여 고향에 갔다.

"난 학교를 네 곳이나 다녔으나 졸업장은 한 장도 받지 못했지. 내가 성공한 후에 중동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인가를 보내주어서 간직하고 있는 것이 내 학력의 전부야."

나이가 들어서 이병철은 학창 시절을 상기하며 가끔 이런 말을 했다. 들어가면 건너 뛰어 위로 올라가기를 거듭한 이병철의 독톡한 학력 스토리이다.

집에 와서 할 일 없이 몸 걱정만 하다가 몸이 약간 좋아진 다음에 서울에 와서 또 할 일 없이 세월을 보냈다. 부잣 집 아들이고 동경 유학까지 다녀온 그는 취직 같은 것을 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벌써 나이는 스물 여섯이었고, 아이들은 셋이나 되었다. 문득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에 번개처럼 스쳐갔다.

"네 몫으로 300 석 땅을 주려던 참이었다."

아버지의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와 상의하여 그 때까지 이병철의 집애 살고 있던 다섯 가구의 종 문서를 불사르고, 땅을 주어 독립토록했다. 당시 세태로는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행동이었고, 이를 두고 친척들과 인근 사람들 중에는 비난과 찬사가 엇갈렸다.

무엇인가 해야한다는 자각이 든 이병철은 '어데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나를 생각해 보았다. 서울 평양 부산 대구 다 생각해 보았으나 고향 인근의 포근 항구 마산이 떠올랐다. 마산은 조선 각지에서 생산한 쌀을 수집하여 도정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도정공장이 있었다. 공장마다 수 백 가마니씩 도정을 기다리는 벼덤이들이 있었다. 옳다! 이거다! 친구 둘과 힘을 합해 동업(同業)으로 정미소를 차렸다.

그리고 자동차회사도 하나 인수했다. 그 간에 그 회사에서 가지고 있던 헌 자동차 열 대에 새 자동차 열 대를 더 구입했다. 당시 자동차 한 대 값은 지금쯤 비행기 한 대 값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동차회사는 문제가 없었으나 정무소가 문제였다. 돈은 벌기는 커녕 본전을 까먹고 있었다. 같이 동업을 시작한 두 친구 중에 한 친구가 그만 두자고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쌀 값이 내릴 때는 사고, 올라갈 때는 파는' 방법에 착상한 후 다음 해부터 정미소에서도 큰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동차 잘 달려!

정미소 잘 돌아가!

떼돈을 벌었다. 돈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때의 이병철의 머리에 대농(대(大農) 출신답게 땅 생각이 났다. 김해 평야에 나온 땅을 전부 사기로 작정했다. 돈은 번 돈과 은행 돈을 쓰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당시는 농토를 담보로 제공하면 80 퍼센트까지 은행 융자가 가능했다.

땅을 사놓고 은행과 정산을 하려할 때의 일이다. 은행에서 모자라는 돈을 가지고 오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이 남았다고 내주는 것이었다. 별 희한한 일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연은 이랬다. 땅을 사서 등기하고 정산하는 사이에 땅의 은행 감정가가 올라 융자 돈이 많아져, 땅을 사고도 돈이 남았다. 이로써 청년 이병철은 일약 200만평의 대지주의 일류 갑부가 되었다. 대구 부산에 주택 부지도 사놓았다.

이병철의 특징이 있었다. 이병철은 사업체를 벌려 놓으면 '일은 맡겨놓는 성질'이 있었다. 그는 정미소와 자동차회사와 땅을 각각 맡길만한 사람들에게 맡겨놓고 밤 마다 놀러 다녔다. 마산에 몇 안되는 요정들이 모두 그의 단골들이었다. 그래서 낮에는 사업체에서 돈 버는 것을 구경 감독 지휘하고, 밤에는 춤 추고 노래하고 풍류를 고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었다.

햇빛이 쨍쨍 난다고 365일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먹구름이 찾아왔다. 중일전쟁이 터져 은행은 융자를 중지하고, 이미 융자해 준 대금을 회수하고 있었다. 개인이 아무리 사업 수완이 좋고 운이 있다고 하더라도, 세월(歲月)이 돕지 않으면 재물(財物)은 지킬 수도 없고 늘릴 수도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병철은 정미소 자동차회사 김해땅을 모두 팔아 은행 빚을 갚았다. 서른 살 때의 일이다. 모든 것이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되었고, 인생은 다시 원점(原點)으로 돌아갔다. 뜻을 세워 마산에 입지(立地)하였으나, 뜻만 남고 땅은 없어진 빈 털털이 이병철이었다.


2. 하늘엔 별이 땅엔 이병철이 






세상은 숫자 놀음인가. 숫자에 얽힌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서양 사람들은 유난히 7 자를 좋아한다. 7 자를 럭키 세븐이라 한다. 행운의 상징이라는 말이다. 대신 13 자를 싫어하고 금요일이도 싫어한다. 그래서 그들은 13 자와 금요일이 겹치는 '써틴 플라이데이'를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한다.

우리나라에서는 4 자를 싫어한다. 20세기 전야인 지금도 서울 시내 고층 빌딩의 엘리베이터를 타면 4 자는 아예 없는 곳이 많고, 어떤 곳에는 영어의 4 자를 뜻하는 퍼 자의 첫 자인 에프 자만 달랑 써놓은 곳이 수두룩이다.

대신 우리들은 1 자나 3 자, 또는 5 자나 7 자를 좋아한다. 1 자는 1등이라 좋고, 3 자는 다음에 설명하는 이유로 좋으며, 5 자는 별을 骕하거나 별 중에서도 5성(星)을 뜻하여 좋아하고, 7 자는 서양의 럭키 세븐 의미 뿐만 아니라 북두칠성 같은 상징적인 일곱 별이 있어 좋아하다.

그러면 한국인이 왜 3 자를 유독히 좋아하는가.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3 자는 쓰러지지 않는 숫자이다. 화로나 삼발이가 달려 있는 모든 가구와 기구들은 쓰러지지 않고 안전하게 서 있다. 거기다가 삼성물산을 세워 대성(大成)을 거듭한 이병철의 자서전 호암자전의 설명에 의하면 3 자는 '크고 많고 강한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좋다고 한다. 글세 성공한 3 자는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지도 모를 일이다.

옇든 마산에서 망한 이병철은 천하(天下) 주유(走遊) 길에 오른다. 부산 서울 평양 신의주 원산 함흥 심경 봉천 북경 청도 상해를 두어달에 걸쳐 돌아다닌다. 놀러 다닌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할 것이 없을가 눈여겨 보기 위한 여행이었다. 사업가의 눈으로 조선과 만주, 그리고 중국 땅을 돌아보니, 마산에서 하던 장사는 장사가 아니었다. 세상에는 수 백 대의 차들이 물건을 실으려고 기다리는 방대한 창고를 비롯하여 엄청난 규모의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망한 이병철로는 감히 염두(念頭)도 내지 못할 규모들의 사업이 세상에는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반 년 후에 대구에 갔다. 거기에서 이병철 생애 최초의 '삼성' 회사인 삼성상회를 열었다. 1938년의 일이다. 대구의 청과물과 포항의 건어물을 수집하여 만주와 중국에 파는 장사였다. 장사는 그런대로 잘 되었다.

대구에 조선양조라는 양조장이 있었다. 청주라는 맑은 술을 만드는 곳이었다. 매물로 나와 덥석 사들였다. 술은 밀주 단속으로 만들기가 무섭게 절로 팔려 나갔다. 양조장은 돈을 벌기 위하여 장사를 하는 곳이 아니라, 술만 만들어 놓으면 자동으로 돈을 벌어주는 '자동돈벌이기계'나 다름이 없었다. 사업에 있어서 업종 선택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이 때 이미 이병철은 대구의 부자가 되었다. 그냥 부자가 아니었다. 갑부(甲富) 또는 거부(巨富)라 해야 옳을 손꼽히는 부자였다. 돈 버는 것이 신이 나서 대구 시내는 물론 부산 서울 평양 일본까지 '순전히 술을 먹으러' 출장을 가기도 했다. 요즘 말하는 '신바람'이 그 때 이미 이병철의 몸에 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병철은 속으로 한탄했다. 그는 조선이 '4무(無) 나라'라고 생각했다. 4무 나라란 나라가 없는 나라, 주권을 빼앗긴 나라, 기업이 없는 나라, 부자가 없는 나라라는 뜻이다. 세계 정세에 눈이 어둡고 뒤떨어져 망한 나라에 무슨 부자와 거부, 그리고 기업과 재벌이 있단 말인가. 이병철은 돈은 벌어 갑부가 되었으나 나라가 슬펐다. 나라없는 부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입맛이 썼다.

그 때 제2차대전은 격화되었고, 조선을 강점한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소개령(疏開令)이 내렸다. 양조장과 삼성물산의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맡기고 고향으로 갔다. 마산에서도 그랬지만 이병철은 믿지 않으면 쓰지 않고 믿으면 의심하기 않고 모든 것을 맡기는 용인술(傭人術)을 가진 걸인(傑人)이었다.

고향에서 8.15를 맞고 3일 후인 8월 17일에 대구에 갔다. 친구들과 조선민보를 인수하여 대구민보로 개칭하고 신문을 냈다. 이것이 이병철이 맺은 언론과의 첫 인연이다. 술은 이름을 '월계관'이라는 화려한 상표를 붙여 출고하자 정말 월계관을 쓴 선수처럼 잘도 팔려 나갔다. 신나는 일이었다.

그 때 대구에 10.1 폭동이 일어났다. 대구는 좌익 세력이 강하던 곳이다. 폭풍과 같은 폭동이 지나자 미국에서 환국한 당대 한국 최고의 정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승만 박사가 대구에 온다는 소리가 들렸다.

30 여 명으로 구성된 이 박사 환영단의 일원으로 왜관까지 마중을 나갔다. 걸출(傑出)한 풍모(風貌)의 이 박사가 나타났다. 한 사람 한 사람 악수를 하며 그 사람에 맞는 유머어와 위트를 즐기며 통성명(通姓名)하는 이 박사의 모습은 한 눈에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이 아무개 아들 이병철이옵니다."

"아, 그런가! 아버지를 꼭 빼어 닮았군. 아버지는 잘 계신가. 그러고 자네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예, 무역업과 양조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젊은이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하지. 그런데 미국 같은 나라는 장기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술을 개발하여 세계에 팔고 있는데, 우리나라 막걸리는 장기 보관성이 없지?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술을 만들어 수출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서울에 올라오면 한 번 우리 집에 찾아오게나."

"네 알겠습니다. 찾아가 뵙겠습니다."

이병철과 이승만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희색(喜色)이 만면(滿面)이고, 임기응변(臨機應變)에 사통팔달(四通八達)한 다정한 위인이었다. 이병철은 이승만과의 첫 만남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풍모가 그만하면 족히 나라를 이끌 수 있는 위인이라 생각했다. 여운형 김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 이승만에게 있었다.

회사 일로 서울에 갈 일이 생겼다. 서울에 온 김에 대구 촌놈이 이 박사를 만나러 이화장에 갔다. 이 박사는 미국에서 막 전달된 전보 내용을 설명하며 남북한 공동 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면, 남한 단독 정부라도 우선 세워야 세계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릴 수 있다는 해박한 정치 정세와 대책을 특유한 열변(熱辯)으로 진지하게 토해냈다. 이병철은 또 감명을 받았다. 역시 이승만이 있어야 나라다운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대구는 남쪽 끝이라 사업을 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부산과 평양, 그리고 북경과 동경, 더 나아가서는 워싱턴이나 파리와 같은 세계를 상대로 큰 장사판을 벌이려면 아무래도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병철은 솔가(率家)하여 서울 헤화동으로 이사한다. 1947년의 일이었다.

다음 해에 종로2가에 두 번째 삼성 회사인 삼성물산공사라는 수출입업체를 세운다. 오징어를 수출하며 면포를 수입하기 시작했고, 곧 이어 품목 확대에 박차를 가해 금방 수입 품목이 100 여 품목으로 늘었다. 물자 빈곤 시대라서 물건은 국내에 들어오기만 하면 없어서 못팔 정도였다. 수출입 상대국이 미국 등지로 늘어났다. 이 때부터 세계는 삼성과 끈이 닿고 있었다.

창업 다음 해에 삼성은 무역 랭킹 7위를 마크하다가 곧 천우사 동아상사 경향실업 등을 창업 1년 6개월만에 따돌리고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다. 대성(大成)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 때부터 '하늘엔 별이, 땅엔 이병철'이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로써 이 나라에 '이병철의 거부행진'이 시작된다. 


3. 천하 제일 제일 주의 







"미스터 리, 이게 무엇인줄 알겠오?"

"글세, 그게 뭐요?"

"뭐긴 뭐라니! 당신이 그 일을 해내면 내가 이렇게 새처럼 하늘을 날겠오!"

"저런 빌어 먹을!"

이병철이 무엇인가 한다고 하자 미국 놈이 나타나 그걸 해내면 자신은 새가 되어 하늘을 날겠다고 양 팔을 벌려 새가 나는 시늉을 하면서 조롱하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당시 우리 나라는 그런 나라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 믿어 주는 외국인들이 없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가. 그에 대해서는 좀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해방 후 서울에 올라가 무역회사로 떼돈을 벌어 갑부가 된 이병철의 그 뒤 행적(行蹟)을 보자.

이야기는 잠시 이승만에 관한 이야기를 약간 걸쳐간다. 이승만은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로 있을 때에 항일(抗日)과 독립(獨立)이라는 2대 정신 지주를 가지고 미국을 중심으로 망명 생활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조국이 해방되자 귀국한 이승만의 항일독립사상은 배일(排日) 건국(建國) 사상으로 바뀌었다. 나라는 하루 빨리 건국해야 하고, 철천지 웬수가 된 일본은 배격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혹자는 이를 이승만의 반일(反日) 애국(愛國) 사상이라 한다.

1950년 초, 그러니까 국회 간접 선거로 이승만이 초대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 되어 정부를 수립한지 1년 반쯤이 되던 때다. 대한민국 경제계 인사들이 시찰단을 조직하여 동경으로 갔다. 배일반일 사상이 골수(骨髓)에 사뭇쳐 일본이라면 금방 감정이 폭발하여 안면 근육 마비증에 걸린 이승만의 얼굴이 불덩이가 되어 씰룩거릴 때다. 방일을 앞두고 대통령 이승만의 허락을 받기까지에는 어려움이 많았던 시찰단이다. 이 일행에 당연히 이병철이 끼었다.

일본은 이병철이 와세다 대학을 다니던 때의 일본이 아니었다. 폐허(廢墟) 바로 그것이었고, 거리에는 폐인(廢人) 바로 그런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전쟁이 얼마나 무서웁고, 전쟁을 일으키고 남의 나라를 압박한 자들이 얼마나 무서운 하늘의 재앙(災殃)을 받는지를 이병철은 패전(敗戰) 일본(日本) 동경(東京)을 보고 똑똑히 보고 느꼈다. 전쟁은 인류의 적이며, 다시는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점을 깊히 느낀 후에 귀국했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어데 있단 말인가. 일본에 가서 전쟁의 피해를 목격하고 온 이병철의 눈 앞에 우루룽 쾅쾅 귀가 째질듯한 포성과 함께 전쟁의 소리가 들렸다. 공산당이 남침하여 서울을 점령한 6.25 사변이 바로 그 때에 터졌다.

방송을 들으니 국군이 인민군을 무찌르고 있다며, 서울 시민과 국민은 동요를 하지 말라고 했다. 전시에 방송을 믿지 않고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이병철은 라디오 소리만 믿고 매일 같이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우렸다.

그러나 라디오 소리와 세상은 달랐다. 국군은 한강을 건너 도망치고 인민군은 도망치는 국군을 뒤쫏고 있었다. 그가 타던 미국 시보레 신형 세단차는 어느 사이에 남로당의 박헌영이 타고 다니는 것이 눈에 보였다. 랭킹 1위 이병철의 무역 회사는 날아가고 없어진거나 다름이 없었다.

9.28 수복 후 잠시 숨을 쉬고 있을 때에 중국군이 쏟아져 내려와 1.4 후퇴의 긴 행렬이 이어진다. 이병철은 이 때에 대구로 내려간다. 서울에 올라오기 전에 맡겨 놓았던 양조장을 찾아갔다.

"아이구, 사장님! 세상에 이 무슨 난리입니까? 여기에 저희들이 돈을 벌어 놓았으니, 이 돈을 가지고 무엇이던지 다시 시작하십시오."

고마웠다. 그들은 그 동안에 많은 돈을 벌어 놓고 있었다. 사람 사회에 사람을 믿고 맡기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좋고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이어서 이병철은 부산에 내려가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운영한다. 1951년의 일이다.

이병철! 그는 사업의 귀재(鬼才)인가, 아니면 하늘에서 내놓은 사람인가! 부산 생활 1 년만에 사세(社勢)는 급성장하여 자본금은 무려 20 배나 늘었다. 남들은 그런 이병철을 보고 혀를 찼다. 본인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성장이었다.

그러나..... 그러나, 어떻단 말인가? 헛 일이었다. 헛일이라니 무엇이 헛일이란 말인가. 돈을 자본금의 20배나 벌었어도 극심한 인프레이션 때문에 거품 뿐이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무엇이던지 제조업을 해야겠다. 제조업을 하지 않는한 돈은 아무리 벌어도 거품이다. 그런데 무슨 제조업을 해야 할가?"

당시 이병철이 착수하고자 검토한 제조업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제당(製糖)이고, 다른 하나는 제지(製紙)였으며, 또 하나는 제약(製藥)이었다. 종이 설탕 약은 거의 모두 외국 수입품이나 밀수품에 의지하던 때다. 고심 끝에 다른 사람들의 만류(挽留)가 있었으나 제당 공장을 건설하기로 결심했다. 마흔 세 살 때의 일이다.

회사 이름을 지어야 했다. 쉽게 생각하면 삼성물산과 같은 삼성제당이라 해도 좋을 것이지만 보다 나은 이름이 없을가 궁리(窮理)에 궁리를 거듭했다. 생각이 났다. 무슨 일을 하던지 제일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제일제당이라 작명했다. 천하(天下) 제일(第一) 제일주의(第一主義)를 추구하는 삼성 정신이 이 작명에서 유래한다.

한국 최대 현대식 설탕 공장을 세워놓고 시운전(試運轉)을 할 때였다. 원당(原糖)을 넣으면 하얗고 뽀얀 백설탕 가루가 쏟아져 나와야 하는데, 온 공장이 떠나갈 듯 드르륵 소리와 함께 공장이 쓰러질 듯 진동을 거듭했다. 실패였다. 왜 그럴가, 아무리 원인을 조사해도 그 이유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이병철은 매일 공장에 나갔다. 그 때 용접공 하나가 아무래도 원당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넣고 기계를 돌리기 때문에 기계가 무거워 떠는 것 같다고 했다. 이병철이 그 용접공의 말대로 원당을 조금씩 넣고 기계를 돌려 보니, 하얀 사탕 가루가 쏟아져 나왔다. 성공이었다. 이로써 우리 국민은 우리 손으로 만든 설탕을 먹에 되었고, 설탕 산업에 뛰어든 이병철은 보다 차원 높은 기업 운영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제일제당 설립 2년 후에 거부 소리를 듣는 이병철의 이름이 천하를 진동했다. 이병철은 거기에서 또 다른 생각을 했다.

"기업은 창조의 기쁨이다. 다음 단계는 또 무슨 사업을 해야 하나?"

옷감 생각이 났다. 그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입는 양복이래야 미군 군복을 검게 물드린 것에 불과했고, 영국에서 오는 모직이나 마카오에서 들어오는 모직으로 양복을 해 입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서 그 때에 그런 양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영국 신사'니, '마카오 신사'니 하며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섬유 산업의 불모지이지만 도전키로 했다. 1954년의 일이다. 그 때에 이병철이 모직 공장을 세운다니까, 그 공장에서 모직이 나오면 새가 되어 하늘을 날겠다는 미국인의 조롱을 받았던 것이다. 2년만에 시운전을 했다. 질은 좀 나빴으나 모직이 나왔다. 공장 기계 조정을 재정비한 후에는 그래도 쓸만한 모직이 나왔다. 모직 생산에 성공한 것이다. 상표는 골든 텍스였다.

그래도 미국놈은 두 팔만 있고 두 날개가 없어서 그런지 새처럼 하늘을 날겠다더니 날지도 못했고, 이병철 앞에는 코빼기도 내놓지 못할 신세가 되었다. 그 때에 우리 손으로 세운 공장에서 나온 모직으로 양복을 해 입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대통령 이승만이 공장에 찾아와 의피창생(衣被蒼生)이라는 휘호 넉 자를 내려 주며 격려해 주었다. 대통령 이승만이 산업 현장을 시찰한 최초의 기록이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이 성공하자 비난과 찬사가 또 쏟아졌다. 이병철은 생산재는 생산하지 않고 소비재만 생산한다는 비난과 함께 그래도 이병철이 아니면 그 많은 설탕과 옷감을 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외화를 썼겠느냐는 옹호론이었다. 이병철은 그런 세론(世論)에 귀를 기우리지 않았다.

번 돈으로 주식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 결과 흥업은행 주의 83퍼센트, 조흥은행 주의 55퍼센트 등 시중 4개 은행의 주식 절반 이상을 사들였고, 호남비료 주식의 45퍼센트, 한국타이어 주식의 50 퍼센트, 삼척시멘트 주식 70 퍼센트 등 방대한 주식을 사모았다.

그 결과 이병철은 명실 공히 한국 산업 금륭의 리더가 되었고, 갑부의 범주를 넘어 한국 최초의 재벌(財閥)이니, 한국 제일의 기업가하는 평판이 나왔다. 나이 쉰 살 때의 일이다. 이병철의 천하제일 제일주의 삼성철학의 승리였다.


4. 뼈를 깎는 아픔








분골쇄신(粉骨碎身)이란 말이 있다. 뼈를 빻고 몸을 부수는 아픔이라는 뜻이다. 그런 아픔이 없으면 인생에 성공이 없다는 말로 흔히 쓰인다. 앞에 나온 세 글을 보고 이병철은 운이 좋아 쉽게 돈을 벌고 한국 최초 재벌이 된 것처럼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지 모른다. 그것은 곡해(曲解)이다. 이병철 역시 대목 대목마다 뼈를 깎는 아픔을 겪었고, 그러한 아픔이 그의 일생에 한 두 번이 아니었다.

1958년의 일이다. 미국에서 일을 보고 년말에 귀국하다가 잠시 동경에 들렀다. 눈이 어찌나 많이 왔는지 비행기가 뜨지 못하여 새해를 동경에서 맞았다. 라디오와 텔레비젼에서 정치 경제 문화 사회에 대한 새해 전망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고, 특히 국제 정치와 국제 경제에 대한 해박한 해설과 전망 특집 프로가 마음에 들었다. 비즈니스 맨에게는 참으로 유익한 프로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병철은 그 후 동경에서 새해를 맞고 새해 구상을 하는 습관이 붙는다.

귀국한 후 이기붕 국회의장과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비료 공장을 세우겠다는 뜻을 밝혔다. 달러라면 걱정부터 하는 대통령에게 달러는 외국 차관으로 해결하겠다는 말을 했다. 이병철이 비료 공장을 세우려고 한 것은 우리나라가 본디 농본국이나, 전통적인 퇴비 거름만 가지고는 증산(增産)이 불가능하고, 질소 인산 가리 모든 비료를 수입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비료를 직접 만들어 공급하면 수입 대체 효과가 대단히 크고 사업가로서는 자신과 국가와 국민에세 아주 유익한 사업을 하게 된다는 판단에서 기인한다.

이 박사의 승인을 받고 차관 도입 교섭을 위해 서독으로 갔다. 상담(商談)은 성공적이었다. 이병철은 이제 우리나라도 우리 비료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날이 곧 오게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다. 그 때 고국에서 대규모 학생 데모가 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 일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 하야(下野)했다는 소식이 왔다. 정변(政變)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이병철은 이 사태를 보고 크게 놀랐다.

어렵게 차관 도입에 성공했으나 도로아미타불이었다. 어두운 마음으로 프랑스 파리를 거쳐 미국에 갔다가 동경으로 왔다. 이 때에 이병철이 이끄는 열 댓 개의 기업에 탈세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여섯 개 회사는 탈세 혐의로 정식으로 입건되었다. 소위 부적축재 혐의자가 된 것이다. 이병철은 귀국하여 생전 처음 검찰에 출두했다. 한국비료 건설 계획은 이미 잊혀지고 학생 혁명의 불길 속에민주당 정권이 탄생했다.

재무부장관 김영선이 밤중에 이병철의 집을 찾아왔다. 한국비료 공장 건설 계획을 계속해 달라고 했다. 이병철은 부정축재자로 몰면서 공장을 세우라고 하면 어떻게 세우느냐고 면박을 주었다. 그것은 일시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없는 것으로 하고 국가를 위하여 계속 추진해 달라는 장관의 말에, 여권까지 빼앗고 어떻게 외국에 가서 공장 건설 업무를 추진하느냐고 반문했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김영선이 이병철의 여권을 내주어 다시 일본에 나가 비료 공장 건설 계획을 추진한다. 이로써 한국비료는 자유당 정권과 민주당 정권, 두 정권에 걸쳐 국책 사업으로 인정되어 추진하게 된다. 그 때에 또 난리가난다. 이병철이 일본에 있을 때다. 5.16 군사 쿠테타였다. 국내에 있던 유력한 경제인들이 부정축재자로 몰려 구속되고, 이병철 역시 부정축재자의 두목으로 수배되었다.

일본 경찰에서 신병을 보호해 주겠다고 제의해 왔다. 그러나 이병철은 일본 경찰의 보호를 거절했다. 그 때였다. 두 젊은 사람이 호텔로 찾아와 협박 공갈을 치고 갔다. 동경의 밤하늘은 휘황찬란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어두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귀국(歸國)하여 전재산을 국가에 헌납(獻納)하겠다."

기자들이 정말이냐고 물으며 급전(急電)으로 국내와 세계에 이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이병철은 김포로 돌아왔다. 공항에는 검은 찝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짐짝처럼 실린 이병철은 이들에 이끌려 강제로 명동 메트로호텔에 강제 숙박된다. 이어서 국가재건최고회의 검은 선그라스를 낀 박정희 앞으로 안내된다.

박정희는 첫 인상에 차갑고 당돌하고 과묵한 군인으로 보였다. 부정축재자 두목과 군사쿠테타 두목이 만난 셈이다. 박정희를 만난 다음에 집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구속되어 있는 다른 동료 경제인들이 풀려나기 전에는 집에 갈 수 없다고 버티어 결국 다른 동료들이 다 풀려난 것을 확인한 다음에 집으로 갔다.

몇 일 후에 박정희와 두 번째 면담이 있었다. 이병철은 기업인을 죄인(罪人)으로 몰면 안된다는 강한 발언과 함께, 재산 몰수나 환수와 같은 강압적인 방법보다는 경제인들이 스스로 국가가 필요한 공장을 지어 국가에 보답하는 길을 모색하도록 해달라고 간청했다. 후에 '투자 명령'이라는 희한한 법적 근거를 만들고 부정축재자라는 오명(汚名)을 뒤짚어 썼던 기업인들이 다투어 공장을 짓는다.

이어서 박정희와 장기영은 이병철이 추진하던 한국비료 공장의 준공에 관심을 피력하였다. 이병철의 한국비료는 이로써 자유당 정권과 민주당 정권, 그리고 군사 정권에 이르는 3대 정권에 걸쳐 지대한 관심을 갖는 중대한 프로젝트로 인정 받았다. 사실 이병철의 한국비교공장 건설 계획은 그만큼 정부의 정책을 앞질러 간 한 기업인의 국가의 사활이 걸린 아이디어였다. 35만 평의 부지에 세계 최대 비료 공장 건설 계획이 세워져 80 퍼센트의 공정이 완성되었다. 그 때였다.

"회장님! 큰 일 났습니다."

동경에 있는 그에게 급한 전화가 왔다. OTSA 6만톤 매각 사건이 터졌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차남 창희가 구속되었다. 그 때 이병철의 머리에는 이상한 생각이 스쳐갔다. 얼마전의 일이다. 후일 사가(史家)들이 밝히겠지만 건설 중인 한국비료의 주식 30퍼센트를 달라는 자가 있었다. 권력의 탈을 쓴 도둑놈이었다. 이병철은 그를 거절했다. 그 보복으로 한비사건이 터졌다고 이병철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분한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수습할 길이 없었다. 재벌이 밀수까지 했다는 국민의 비난이 쏘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삼성의 하늘은 하루 아침에 먹구름에 휩싸였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운이 따르지 않으면 사업을 벌려 놓아도 그 사업은 내 것이 아니다. 설령 그 사업이 성공을 해도 인간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이고 기업은 세상에 남는다. 10년 세월 3대 정권에 걸쳐 추진한 내 몸의 일부와 같은 한국비료이지만, 이 기업을 내가 가지나 국가가 가지나 국가와 국민에게 도움이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다. 국가에 헌납하자."

한국비료를 완성하여 국가에 헌납하기로 했다. 뼈를 깎는 아픔이었다. 이 사건으로 부모와 자식 간에도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인간 이병철과 기업 삼성의 위기였다. 이 때에 어떤 간 부 한 사람은 삼성이 망한다고 삼성 재산의 3분의 1을 맡겨 놓은 회사 인감을 도용(盜用)하여 자기 앞으로 앗아갔고, 어떤 사람은 삼성 새산의 반은 자기 것이라면 재산을 나우어 달라고 떼를 썼다.

세상은 참으로 기막힌 세상이었다. 이병철은 한 동안 하늘과 땅만 보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4.19와 5.16을 겪으면서 경제인의 한계를 절감하고 한 때 정계로 투신할가 잠시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정말 한국에서 경제인의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럭키그룹 '구인회3'에서 밝히는 '연암과 호암'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병철이 언론 사업을 펼치고도 그런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된다. 이병철은 해방후 대구에서 신문을 할 정도로 언론에 관심이 많았고, 기업을 하는 사람이 언론까지 갖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언론을 갖지 않은 기업이라고 해서 언론으로부터 부당한 비판을 받는 것도 옳지 않다는 것이 이병철의 언론관이다.

동양라디오 동양텔레비젼 중앙일보 3대 매스컴이 이병철이 세운 언론기관이다. 세 매체 모두 일거(一擧)에 전국을 장악한 전파 영상 인쇄 매체이다. 누구도 삼성 언론 아성에 도전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 때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 세력이 대두하였다. 거기에 말썽 많은 허문도가 끼어 언론 통폐합이라는 작업을 했다.

허문도 그는 원래 전두환의 사람이 아니었다. 일본에 있다가 조선일보 일본 특파원 보조원을 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잠시 조선일보 외신부에 있다가 일본에 건너가 공관에 취직해 했은 무명 청년이다.

10.26 직후였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신상초가 되리고 온 일본 와세다대 마쓰바라 다다시 교수와 술 잔을 기우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마쓰바라 교수가 한국에 오기 위하여 비자를 받으러 주일한국대사관에 갔더니, 다른 사람들은 다 박정희를 욕하는 분위기였으나 허문도라는 사람만은 박정희가 위대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는 말을 했다. 그 소리에 귀가 번쩍한 전두환은 옆 방에 있던 권정달 대령을 불러 '내일 아침 허문도를 부르라'는 특명을 내린다. 그래서 허문도는 전두환과 생전 처음 만나게 된다.

제 뿌리를 모르는 허문도는 전두환이 직접 불렀다는 사실 하나를 가지고 허삼수 허화평 같은 실세들 속에 '같은 허씨'로 끼어 소위 '쓰리 허' 허세를 창조했고, 그 허세가 바로 한국 언론 통폐합의 '칼 휘둘러' 장본인인 허문도였다. 이병철은 이들의 음모와 권력에 의하여 동양텔레비젼방송과 동양라디오방송을 빼앗기고, 간신히 중앙일보만 남기게 된다.

이병철의 또 하나의 슬픔이었다. 한국비료를 잃고, 자식을 잃고, 텔레비젼과 라디오 방송국을 잃고.... 수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병철은 간단히 필설로 평하기가 어려운 인물이다. 딱! 잘라 뱃포가 크다고 할 수도 없고, 거시적인 경제인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저 어떤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힘든 대물(大物)이다.

한국비료와 매스컴을 잃고 이병철은 끄떡하지 않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60 중반을 넘어 이상하게 배가 아팠다. 수술 전에 위암(胃癌)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암에 걸리면 죽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나 죽음을 감지한 이병철은 마음 속으로는 충격을 받았으나 겉으로는 태연했다. 태연히 수술을 받고 태연히 사무실에 나와 태연히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할' 삼성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정리했다. 그 때 이병철의 모습이 이 세상에 남긴 참으로 대물다운 풍모였다.


-중략-


천리안사이트에 이런 글이 있길래 '요거다' 싶은 맘에 댓글 하나 남김 없이 퍼와버렸다. 

상황을 보아하니 현재는 관리가 안되는 사이트 같던데... 그래도 글 하나 정도는 남겨야 되지 않나 하는 마음이 남는다. 


관련 자료를 꼭 찾아서 추후에라도 '이병철'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알아보고 싶다. 

왠지 나랑 비슷한 면이 느껴져서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