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년 거부 원점 회귀 입지전
이병철, 그는 확실히 부자 집의 아들었다. 1910년 경상남도 선령의 1,000 석 꾼 이찬우와 안동 권 씨 사이에 태어난 4남매의 막내둥이이다. 그 시대에 1 천 석을 할 수 있는 집은 조선 땅에 그리 많지 않았다. 부자라 해야 100 석을 하는 사람이 한 면에 한 둘 있을 정도였고, 대개는 지주와 소작인 관계를 유지하며 농업에 종사했고, 소작인들 중에는 대대로 지주 집에서 일하고 먹고 사는 종살이로 일생을 보내는 경우도 흔했다.
할아버지는 거유(巨儒)였고, 아버지는 시골에서 큰 농사를 지으면서도 한양 땅을 오고가며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에 관여할 정도로 활동적이었고, 선구적이었다. 그 때에 이병철의 아버지는 한양땅에서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 이승만을 만나 서로 교류한다.
다섯 살에 할아버지가 세운 서당에 들어가 천자문을 배운다. 남들은 두 세 달이면 뗀다는 천자문을 그는 1년 동안 배웠다. 진도가 좀 늦기는 하였으나 5년 간의 한문 수학은 논어(論語)까지 통독(通讀)하게 했다.
열 한 살에 진주에 있는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고, 곧 바로 외가가 있는 서울 가회동으로 와서 수송보통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 때에 속성과가 있는 중동중학교에 전학한다. 속성과란 보통학교를 속성으로 졸업하고 중학교 과정을 시작하는 당시 학제(학(學制)였다.
서울에 와서 이병철이 가장 어려움을 겪은 일은 친구들과 언어 소통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경상도 말과 서울 말이 그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 서울 아이들끼리 하는 말을 알아 들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가 하는 경상도 말씨를 서울 아이들이 알아 듣지 못해 상당 기간 무척 애를 먹었다. 교통과 통신이 두절되었던 당시의 조선 땅은 그런 땅이었다.
혼담이 성사되었으니 모년 모월 모시에 내려오라는 아버지의 편지가 왔다. 그 때의 결혼은 거의가 그랬다. 부모가 배필(配匹)을 정해 주면 그것을 천생연분(天生緣分)으로 알고 평생을 백년해로(百年偕老)하는 부부가 되었다. 중학교 3학년인 열 아홉 살 때의 일이었다. 이 때에 달성 박 씨 처녀와 결혼하여 이 세상에 4남5녀를 둔다.
중학교 4학년 때에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동경으로 유학갈 생각을 한다. 현해탄은 멀고도 험한 바다였다. 멀미가 났다. 1등 칸에 탄 사람들이 보였다. 그는 1등 칸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 서! 여기가 어데라고 조선놈이 오는가? 돈도 없는 조선놈이 건방지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돈은 얼마던지 있었다. 분했다. 나라없는 슬픔이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나라가 없으면 돈이 있어도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서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젊은 이병철의 뼈 속까지 파고 들었다.
와세다대학 정경과(政經科)에 들어갔다. 공부가 무엇인지 그 진미(珍味)를 알고, 한 동안 책벌레가 되었다. 2학년 때다. 이상하게 몸이 아팠다. 휴학을 했다. 그래도 몸은 회복되지 않았다. 이국 땅 객지에서 더 이상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귀국하여 고향에 갔다.
"난 학교를 네 곳이나 다녔으나 졸업장은 한 장도 받지 못했지. 내가 성공한 후에 중동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인가를 보내주어서 간직하고 있는 것이 내 학력의 전부야."
나이가 들어서 이병철은 학창 시절을 상기하며 가끔 이런 말을 했다. 들어가면 건너 뛰어 위로 올라가기를 거듭한 이병철의 독톡한 학력 스토리이다.
집에 와서 할 일 없이 몸 걱정만 하다가 몸이 약간 좋아진 다음에 서울에 와서 또 할 일 없이 세월을 보냈다. 부잣 집 아들이고 동경 유학까지 다녀온 그는 취직 같은 것을 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벌써 나이는 스물 여섯이었고, 아이들은 셋이나 되었다. 문득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에 번개처럼 스쳐갔다.
"네 몫으로 300 석 땅을 주려던 참이었다."
아버지의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와 상의하여 그 때까지 이병철의 집애 살고 있던 다섯 가구의 종 문서를 불사르고, 땅을 주어 독립토록했다. 당시 세태로는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행동이었고, 이를 두고 친척들과 인근 사람들 중에는 비난과 찬사가 엇갈렸다.
무엇인가 해야한다는 자각이 든 이병철은 '어데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나를 생각해 보았다. 서울 평양 부산 대구 다 생각해 보았으나 고향 인근의 포근 항구 마산이 떠올랐다. 마산은 조선 각지에서 생산한 쌀을 수집하여 도정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도정공장이 있었다. 공장마다 수 백 가마니씩 도정을 기다리는 벼덤이들이 있었다. 옳다! 이거다! 친구 둘과 힘을 합해 동업(同業)으로 정미소를 차렸다.
그리고 자동차회사도 하나 인수했다. 그 간에 그 회사에서 가지고 있던 헌 자동차 열 대에 새 자동차 열 대를 더 구입했다. 당시 자동차 한 대 값은 지금쯤 비행기 한 대 값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동차회사는 문제가 없었으나 정무소가 문제였다. 돈은 벌기는 커녕 본전을 까먹고 있었다. 같이 동업을 시작한 두 친구 중에 한 친구가 그만 두자고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쌀 값이 내릴 때는 사고, 올라갈 때는 파는' 방법에 착상한 후 다음 해부터 정미소에서도 큰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동차 잘 달려!
정미소 잘 돌아가!
떼돈을 벌었다. 돈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때의 이병철의 머리에 대농(대(大農) 출신답게 땅 생각이 났다. 김해 평야에 나온 땅을 전부 사기로 작정했다. 돈은 번 돈과 은행 돈을 쓰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당시는 농토를 담보로 제공하면 80 퍼센트까지 은행 융자가 가능했다.
땅을 사놓고 은행과 정산을 하려할 때의 일이다. 은행에서 모자라는 돈을 가지고 오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이 남았다고 내주는 것이었다. 별 희한한 일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연은 이랬다. 땅을 사서 등기하고 정산하는 사이에 땅의 은행 감정가가 올라 융자 돈이 많아져, 땅을 사고도 돈이 남았다. 이로써 청년 이병철은 일약 200만평의 대지주의 일류 갑부가 되었다. 대구 부산에 주택 부지도 사놓았다.
이병철의 특징이 있었다. 이병철은 사업체를 벌려 놓으면 '일은 맡겨놓는 성질'이 있었다. 그는 정미소와 자동차회사와 땅을 각각 맡길만한 사람들에게 맡겨놓고 밤 마다 놀러 다녔다. 마산에 몇 안되는 요정들이 모두 그의 단골들이었다. 그래서 낮에는 사업체에서 돈 버는 것을 구경 감독 지휘하고, 밤에는 춤 추고 노래하고 풍류를 고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었다.
햇빛이 쨍쨍 난다고 365일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먹구름이 찾아왔다. 중일전쟁이 터져 은행은 융자를 중지하고, 이미 융자해 준 대금을 회수하고 있었다. 개인이 아무리 사업 수완이 좋고 운이 있다고 하더라도, 세월(歲月)이 돕지 않으면 재물(財物)은 지킬 수도 없고 늘릴 수도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병철은 정미소 자동차회사 김해땅을 모두 팔아 은행 빚을 갚았다. 서른 살 때의 일이다. 모든 것이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되었고, 인생은 다시 원점(原點)으로 돌아갔다. 뜻을 세워 마산에 입지(立地)하였으나, 뜻만 남고 땅은 없어진 빈 털털이 이병철이었다.
2. 하늘엔 별이 땅엔 이병철이 세상은 숫자 놀음인가. 숫자에 얽힌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서양 사람들은 유난히 7 자를 좋아한다. 7 자를 럭키 세븐이라 한다. 행운의 상징이라는 말이다. 대신 13 자를 싫어하고 금요일이도 싫어한다. 그래서 그들은 13 자와 금요일이 겹치는 '써틴 플라이데이'를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한다. 우리나라에서는 4 자를 싫어한다. 20세기 전야인 지금도 서울 시내 고층 빌딩의 엘리베이터를 타면 4 자는 아예 없는 곳이 많고, 어떤 곳에는 영어의 4 자를 뜻하는 퍼 자의 첫 자인 에프 자만 달랑 써놓은 곳이 수두룩이다. 대신 우리들은 1 자나 3 자, 또는 5 자나 7 자를 좋아한다. 1 자는 1등이라 좋고, 3 자는 다음에 설명하는 이유로 좋으며, 5 자는 별을 骕하거나 별 중에서도 5성(星)을 뜻하여 좋아하고, 7 자는 서양의 럭키 세븐 의미 뿐만 아니라 북두칠성 같은 상징적인 일곱 별이 있어 좋아하다. 그러면 한국인이 왜 3 자를 유독히 좋아하는가.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3 자는 쓰러지지 않는 숫자이다. 화로나 삼발이가 달려 있는 모든 가구와 기구들은 쓰러지지 않고 안전하게 서 있다. 거기다가 삼성물산을 세워 대성(大成)을 거듭한 이병철의 자서전 호암자전의 설명에 의하면 3 자는 '크고 많고 강한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좋다고 한다. 글세 성공한 3 자는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지도 모를 일이다. 옇든 마산에서 망한 이병철은 천하(天下) 주유(走遊) 길에 오른다. 부산 서울 평양 신의주 원산 함흥 심경 봉천 북경 청도 상해를 두어달에 걸쳐 돌아다닌다. 놀러 다닌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할 것이 없을가 눈여겨 보기 위한 여행이었다. 사업가의 눈으로 조선과 만주, 그리고 중국 땅을 돌아보니, 마산에서 하던 장사는 장사가 아니었다. 세상에는 수 백 대의 차들이 물건을 실으려고 기다리는 방대한 창고를 비롯하여 엄청난 규모의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망한 이병철로는 감히 염두(念頭)도 내지 못할 규모들의 사업이 세상에는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반 년 후에 대구에 갔다. 거기에서 이병철 생애 최초의 '삼성' 회사인 삼성상회를 열었다. 1938년의 일이다. 대구의 청과물과 포항의 건어물을 수집하여 만주와 중국에 파는 장사였다. 장사는 그런대로 잘 되었다. 대구에 조선양조라는 양조장이 있었다. 청주라는 맑은 술을 만드는 곳이었다. 매물로 나와 덥석 사들였다. 술은 밀주 단속으로 만들기가 무섭게 절로 팔려 나갔다. 양조장은 돈을 벌기 위하여 장사를 하는 곳이 아니라, 술만 만들어 놓으면 자동으로 돈을 벌어주는 '자동돈벌이기계'나 다름이 없었다. 사업에 있어서 업종 선택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이 때 이미 이병철은 대구의 부자가 되었다. 그냥 부자가 아니었다. 갑부(甲富) 또는 거부(巨富)라 해야 옳을 손꼽히는 부자였다. 돈 버는 것이 신이 나서 대구 시내는 물론 부산 서울 평양 일본까지 '순전히 술을 먹으러' 출장을 가기도 했다. 요즘 말하는 '신바람'이 그 때 이미 이병철의 몸에 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병철은 속으로 한탄했다. 그는 조선이 '4무(無) 나라'라고 생각했다. 4무 나라란 나라가 없는 나라, 주권을 빼앗긴 나라, 기업이 없는 나라, 부자가 없는 나라라는 뜻이다. 세계 정세에 눈이 어둡고 뒤떨어져 망한 나라에 무슨 부자와 거부, 그리고 기업과 재벌이 있단 말인가. 이병철은 돈은 벌어 갑부가 되었으나 나라가 슬펐다. 나라없는 부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입맛이 썼다. 그 때 제2차대전은 격화되었고, 조선을 강점한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소개령(疏開令)이 내렸다. 양조장과 삼성물산의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맡기고 고향으로 갔다. 마산에서도 그랬지만 이병철은 믿지 않으면 쓰지 않고 믿으면 의심하기 않고 모든 것을 맡기는 용인술(傭人術)을 가진 걸인(傑人)이었다. 고향에서 8.15를 맞고 3일 후인 8월 17일에 대구에 갔다. 친구들과 조선민보를 인수하여 대구민보로 개칭하고 신문을 냈다. 이것이 이병철이 맺은 언론과의 첫 인연이다. 술은 이름을 '월계관'이라는 화려한 상표를 붙여 출고하자 정말 월계관을 쓴 선수처럼 잘도 팔려 나갔다. 신나는 일이었다. 그 때 대구에 10.1 폭동이 일어났다. 대구는 좌익 세력이 강하던 곳이다. 폭풍과 같은 폭동이 지나자 미국에서 환국한 당대 한국 최고의 정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승만 박사가 대구에 온다는 소리가 들렸다. 30 여 명으로 구성된 이 박사 환영단의 일원으로 왜관까지 마중을 나갔다. 걸출(傑出)한 풍모(風貌)의 이 박사가 나타났다. 한 사람 한 사람 악수를 하며 그 사람에 맞는 유머어와 위트를 즐기며 통성명(通姓名)하는 이 박사의 모습은 한 눈에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이 아무개 아들 이병철이옵니다." "아, 그런가! 아버지를 꼭 빼어 닮았군. 아버지는 잘 계신가. 그러고 자네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예, 무역업과 양조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젊은이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하지. 그런데 미국 같은 나라는 장기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술을 개발하여 세계에 팔고 있는데, 우리나라 막걸리는 장기 보관성이 없지?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술을 만들어 수출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서울에 올라오면 한 번 우리 집에 찾아오게나." "네 알겠습니다. 찾아가 뵙겠습니다." 이병철과 이승만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희색(喜色)이 만면(滿面)이고, 임기응변(臨機應變)에 사통팔달(四通八達)한 다정한 위인이었다. 이병철은 이승만과의 첫 만남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풍모가 그만하면 족히 나라를 이끌 수 있는 위인이라 생각했다. 여운형 김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 이승만에게 있었다. 회사 일로 서울에 갈 일이 생겼다. 서울에 온 김에 대구 촌놈이 이 박사를 만나러 이화장에 갔다. 이 박사는 미국에서 막 전달된 전보 내용을 설명하며 남북한 공동 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면, 남한 단독 정부라도 우선 세워야 세계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릴 수 있다는 해박한 정치 정세와 대책을 특유한 열변(熱辯)으로 진지하게 토해냈다. 이병철은 또 감명을 받았다. 역시 이승만이 있어야 나라다운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대구는 남쪽 끝이라 사업을 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부산과 평양, 그리고 북경과 동경, 더 나아가서는 워싱턴이나 파리와 같은 세계를 상대로 큰 장사판을 벌이려면 아무래도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병철은 솔가(率家)하여 서울 헤화동으로 이사한다. 1947년의 일이었다. 다음 해에 종로2가에 두 번째 삼성 회사인 삼성물산공사라는 수출입업체를 세운다. 오징어를 수출하며 면포를 수입하기 시작했고, 곧 이어 품목 확대에 박차를 가해 금방 수입 품목이 100 여 품목으로 늘었다. 물자 빈곤 시대라서 물건은 국내에 들어오기만 하면 없어서 못팔 정도였다. 수출입 상대국이 미국 등지로 늘어났다. 이 때부터 세계는 삼성과 끈이 닿고 있었다. 창업 다음 해에 삼성은 무역 랭킹 7위를 마크하다가 곧 천우사 동아상사 경향실업 등을 창업 1년 6개월만에 따돌리고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다. 대성(大成)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 때부터 '하늘엔 별이, 땅엔 이병철'이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로써 이 나라에 '이병철의 거부행진'이 시작된다.